글/마달리의 추억

멍에(마달리의 추억)

Sam1212 2012. 4. 17. 23:05

 

 제목 : 멍에

 

 이야기 줄거리

남북이 대치한 한반도에서 201*년 *월 *일 동부전선에서 국지전이 발생 한다.

북의 선제공격으로 남측의 전선이 무너진다. DMZ내의  GP장인 ROTC출신 한중위는 부상당한 부하를 데리고 지하 은신처로 대피한다.

부상자 치료약을 구하기 위해  민간인 마을에 내려갔다가 북한군 정치장교와 조우하게 되고 그를 포로로 잡아 은신처로 돌아온다.

지하 은신처에서 함께 생활하며 상호 갈등과 교감의 시간을 함께한다.

남북 간에 다시 종전이 이루어지고 북의 정치장교 윤성만을 다시 북으로 돌려보낸다.

 

등장 인물

*한중위 :  ROTC 출신 GP장. 작은 체구이나  결단성과 리더쉽이있다.

*고병장 : 부상당한 소대 선임병, 충남 당진출신.크리스찬.

*변병장 : 고병장과 동향 논산훈련소 동기.

*강대연 상병 : 군인 정신 투철하고  우람한 체격의 상병. 전남 담양출신. 입대 전 태권도 선수.

*윤성만 상위 : 북한군 정치 장교 . 투철한 사회주의 사상과 군인정신으로 무장.


주요 무대 : 동부전선 DMZ내 지하 은신처. 강원도 고성 민통선 마을.

 

 

소돔과 고모라의 계곡

 


"야! 중대 본부 빨리 연결해."

"지금 연결 중인데, 접속이 안 됩니다."

유선 전화는 예상 했던대로 불통이다. 한중위는 다급한 표정으로 무전기를 잡았다.

“솔가지 하나,  당소 비룡소둘이다  이상.”

“솔가지 하나, 솔가지 하나, 당소 비룡소둘 이상.”

두 번 연달아 호출해보지만 무전기는 ‘치--익’하는 기계음만 터지고 답신이 없다.

 

한중위는 통신병에게 계속 연락을 취해보라 말하고 다시 벙커를 나와 대공초소로 올라가 전방을 주시했다. 방금 전 총안구를 통해 보았던 유성우같은 북의 포사격과 포성은 조금 잦아들었다. 남쪽에서 대응 포격이 시작 되었는지 형제봉 후 사면에서 연달은 폭발음과 함께 오렌지 빛 섬광과 불기둥들이 하늘을 밝히고 있다.

 

한중위가 중대장과 다시 교신을 하기위해 상황실을 들어가서고 있을 때 , 통신병이 무전기를 들고 뛰어온다.

“소대장님 연결 되었습니다.”

한중위는 수화기를 빼앗듯이 받아들었다.

“당소 비룡소둘 이다. 이상.”

‘치--익’하하고 통신음이 터졌다.

 

“비룡소둘, 솔가지 하나 이곳 당했다. 적 따앙--구울, ... 치---이...치---익.”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중대장의 육성을 들으니 무척 반갑다. 그러나 그의 거친 숨소리와 ‘당했다’는 말과 '땅굴'이란 말을 마지막으로 교신이 중단되었다. 상황이 붙은 긴박한 상태였음을 직감할 수 있다.

 

“솔가지하나, 솔가지하나, 여기 비룡소...”

한중위는 수화기를 귀에 더욱 밀착시키고 재차 호출을 해본다. 그때였다. 번쩍하는 섬광을 본 것 같은데, 그 이후는 기억이 전혀 없다.

 

한중위는 얼마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아직 귓속에선 '우-웅'하는 바람소리가 나고 있다. 고막이 터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신실 쪽에서 구해달라는 비명소리를 듣고 서야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정신을 차려 옆에 떨어진 방탄모를 집어 들었을 때는 매캐한 연기가 벙커 안에 자욱했다.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문을 향해 나갔다. 이곳저곳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세발 맞았다. 한 발은 벙커 지붕 위에 떨어져 대공 초소와 야외 식당 건물을 흔적도 없이 날려버렸다. 또 한발은 벙커 우측면에 맞았으나 다행히 탄약고 건물은 아슬아슬하게 비껴 나갔다. 세번째 발은 벙커의 총 안구를 부수고 들어와 통신실을 반 토막 내버렸다.

 

한중위도 방탄모를 벗고 있었다면 크게 당할 수도 있었다. 다행히  헬멭을 쓴 상태에서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쓰러저 큰 부상은 면했으니 천만다행이다. 신음 소리는 통신실에 있던 고경대 병장이다. 대원들의 피해를 파악해보니 대공초소 근무자 2명과 취사장 안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병사 2명이 보이지않았다.

 

부상자도 6명이나 된다. 그중에서도 고경대병장이 가장 심한 중상을 입었다. 간신이 응급 지혈을 한 상태이나 파편이 허벅지를 깊게 파열하여 긴급 수술을 요하는 상태다.

 

이제부터 살아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20여명의 대원들이 소대장 만 바라보고 있다. 한중위는 부소대장을 불렀다.

"엄중사, 빨리 철수 준비를 하세요. 본부와 교신도 단절 이고. 중대도 당한 것 갔습니다. 시간 없어요."

"소대장님, 부상자와 중상자가 많습니다. 전부 이곳을 빠져나가긴 힘들 것 같습니다."

엄중사가 부상자와 중상자 처리를 어떻게 할지 물었다.

 

"앞으로 한 시간 후 면 적들이 도강을 해 이곳 능선으로 붙을 것 같은데, 이곳에서 어물어물하다간 모두 개죽음이야!"

한중위가 지금 어물정거리다가는 모두 당한다고 엄중사를 향해 독촉하였다.

"소대장님, 일단 제 발로 걸을 수 있는 대원들은 뒤로 빠지고, 걸을 수 없는 대원은 비트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한중위도 엄중사의 생각과 같았다. 후방의 본부가 당한 상태에서 뒤로 빠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엄중사, 내가 부상병들을 데리고 이곳에 잔류할 테니 엄중사가 소대원들을 인솔하세요."

“소대장님, 적들이 도강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근무자 한명이 뛰어와 황급하게 보고를 한다.

 

“엄중사는 나보다 이곳 지리에 밝고 경험이 많으니 까치봉 쪽으로 붙어서 본부를 찾아 합류해보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본부 쪽도 적에게 당했다는 교신이 있었으니 여기보다 상황이 더 나쁠 수도 있습니다.”

“저 보다 소대장님이 더 걱정 됩니다.”

엄중사는 이곳에 잔류하겠다는 소대장의 말에 걱정이 된다는 표정이다.

 

“제 생각으론 적진에 남는 것보다 뒤로 빠지는 것이 더 어려울 수도 있어요. 엄중사가 소대장을 대신해 대원들을 책임지고 안전하게 빼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하고 고경대 강대연 변은석 네 명이 '괴목작전'에 들어갑니다.“

 

한중위가 엄중사에게 대원들의 안전을 부탁하며 말했다

"소대장님, 제가 지난주에 혹시나 해서 대원들을 데리고 가서 비트를 점검해 보았습니다. 3호가 그래도 시설이 괜찮고 제일 안전해 보였습니다.”

 

비트는 적 남침 시 적 후방에 잔류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지하에 만들어 놓은 비밀 아지트다. 한중위 GP에도 만약을 위해 3곳의 비트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 3호 비트는 가장 규모가크다..

‘괴목 작전’은 비트에서 생활하며 적 후방을 교란하는 작전의 명칭이다.

 

한중위는 변병장과 강상병을 불러 잔류하여 괴목작전 돌입을 설명해주고 필요한 물품을 챙기도록 명령하였다. 변병장은 고병장과 동향이다. 게다가 대원들 중에서 가장 가깝게 지내는 논산훈련소 동기다. 소대장의 잔류 명령에 당연 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강대연 상병은 전령이다. 소대장과 함께 생사를 같이해야할 임무를 가지고 있었기에 잔류 명령에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소대장님 철수준비 됐습니다."

부소대장이 대원들을 집합시키고  출발 보고를 하러왔다.

그간 2년간 생사를 함께 했던 대원들이다. 한사람씩 악수를 나누었다.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작별 인사를 할 때 엄중사의 랜턴 불빛에 변병장의  눈에 고인 눈물이 번쩍하고 빛났다.

 

대원들이 어둠을 뚫고 멀어져갔다. 마지막 꼬리가 언덕 뒤 숲속으로 사라져버린 뒤에도 한중위는 한참 동안 대원들을 삼켜버린 어둠 속을 쳐다보았다. 한중위는 갑자기 적진에 홀로 남았다는 공포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가다듬고 작전에 들어갈 물품들을 확인해보았다. 전투식량과 라면 박스 버너와 부탄가스 그리고 물통과 부식을 담은 컨테이너박스 제법 짐이 많았다.

 

고병장은 다리에 부목을 대고 있었으나 변병장의 등판에 매달리다시피 한 상태다. 짐을 나누어 메고 벙커를 나와 전방을 쳐다보니 적들이 도강 작전을 하고 있는지 떨어지는 포탄 불빛이 강물에 반사되어 어른거리고 있다.

 

한중위가 대원들과 함께 220고지의 후면 계곡을 건너와 작은 언덕 위에 있는 3호 비트 앞에 도착 했을 때에는 동쪽 하늘에 낀 잿빛 구름들은 벌써 옅은 미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땅속 두더지 생활


괴목3호는 잘 위장된 아지트다. 산 3부 능선 양지바른 언덕에 오래된 묘지로 위장되어있다. 봉분 위엔 잡초들이 무성하다.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서 봉분 앞까지 제법 큰 관목들도 자라나 있다. 봉분 앞에 놓인 이끼 낀 상석은 조금 옆으로 기울어져있다. 누가 보아도 수 십 년간 돌보지 않은 주인 없는 묘지다.

 

한중위가 이 묘의 상석 아래에 설치된 비밀 걸쇠를 옆으로 당겼다. 육중한 상석이 스르르 옆으로 밀렸다. 상석 밑으로 흙에 덮인 작은 철판이 나타났다. 다시 철문을 옆으로 살짝 밀치니 지하로 뚫린 출입구가 나왔다.

 

모두들 아지트에 들어갔다. 부소대장이 본인이 사용할 은신처로 계획하고 있었는지 이미 말끔하게 청소가 되어있다. 모포 2장을  간이 침상에 깔았다. 우선 포격으로 중상당한 고병장을 침상에 뉘었다. 벌써부터 눈을 감은 채 가느다랗게 신음을 내고 있다. 입을 악물고 있는 모습이 통증을 힘들게 참아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짐을 풀어 정돈을 해보니 꽤 많이 챙겨 온 것으로 보이나 부족한 것이 많았다. 지하 공간을 밝히는 불이 없다. 손재주가 좋은 변병장의 솜씨가 발휘되었다. 무전기의 예비 배터리를 랜턴에 연결 벽에 걸으니 아쉬운 대로 훌륭한 실내등으로 변환되어 좁은 공간에 희미하나마 한줄기 인공의 빛을 만들어준다.

 

한중위는 이제부터 함께 나누어 가는 일만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은 물론 식사도 함께 나누며 공포와 절망도 서로 나누어 가져야만 이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다. 외부와 단절된 지하 공간에서 생존에 가장 필요한 물품은 물이다. 우선 20리터 수통에 계곡의 물을 가득 채워 오게 했다. 이곳 3호 비트가 위치상으로나, 장기 은신 장소로 좋은 점은 산 능선에서 멀리 떨어진 민통선 마을을 육안 관측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우측의 계곡엔 맑은 물도 흐르고 있다.

 

총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고 있다. 지금쯤 220GP는 적의 수중에 떨어진 것으로 판단되었다. 빨리 출입구를 봉하고 당분간 동면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어둠 속 생활이 시작되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벌써 라면을 두 번 끓여 먹었다. 문제는 고경대병장의 상처다. 압박붕대를 풀어서 허벅지 상처를 확인해 보았다. 파편이 허벅지 근육을 두 군데나 7센티 정도 깊게 파열하고 지나갔다.   파편이 살 속에 박히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상처부위를 한 번 더 소독약으로 깨끗이 소독을 하였지만 고병장이 얼마나 견뎌낼지 걱정이다.

 

변 병장의 간호가 지극정성이다. 동기애가 이렇게 깊은 걸보면 지옥에 떨어져도 동기 한명 만 있으면 희망을 잃지 않고 견뎌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중위는 강대연에게 3시간 마다 한 번씩 중대와 교신을 시도해보라고 지시했다. 지금까지 4번을 시도 했으나 여전히 불통이다. 그래도 무전기만이 외부와 통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원이다. 모두 땅속 두더지가 된 느낌이다.

 

3번째 라면을 끓여 놓고 모여 앉았다. 이때 서있던 강대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손으로 입을 막으며 말했다.

“조용히,...... 무슨 소리가 들렸어요.”

일순간 목덜미에 서늘한 기운이 지나갔다. 긴장감이 무섭게 내리민다. 모두들 하던 동작을 멈추고 두 귀에 온 신경을 모은다.

 

 밖에서 분명 사람 소리가 들린다. 강대연이 소총을 잡으려했다. 한중위가 손 신호로 총을 내리고 불을 끄도록 지시했다. 적의 수색대인지도 모른다. 발견되면 말 그대로 모두 독안에 든 쥐다. 모두들 숨소리도 죽이고 절대 긴장의 시간이 흐른다.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등줄기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이때 고병장의 '아--‘하는 좀 큰소리로 신음소리를 냈다. 모두들 고병장을 바라보았다. 비몽사몽을 헤매며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고병장이 원망스런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공포의 침묵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불켜."

한중위는 불을 켜보라고 변변장에게 나직하게 지시를 내렸다. 불을 키자 모두 다 한 번씩 심호흡을 해댔다. 조금은 안도의 빛이 얼굴에 흐른다. 아마 적의 지원부대나 후발대가 묘지위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지나간 것 갔다.

 

그리고 또 이틀이 지나갔다. 라면과 전투식량으로 만 끼니를 해결하니 모두들 말은 안하지만 김치 생각이 간절하다. 처음 가지고온 감자와 야채는 벌써 떨어졌다. 그래도 군용 된장을 한 반합이나 들고 온 것이 천만 다행이다.

 

하루 밤이 또 지나고 있다고 생각될 무렵에 비트의 문을 열고 나와 맑은 공기를 한 모금 씩 마셨다. 멀리 후방에 있는 마달리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이고 포성이 아주 멀리서 들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전선은 최소 20킬로 후방에 형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아군이 엄청나게 밀려 내려갔다고 생각하니 겁이 나기도 한다.

 

언제부터인지 고병장의 신음소리가 성경 구절 암송로 바뀌었다. 그의 신실한 신앙심이 생존 의지를 이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동기인 변병장이 잠도 자지 않고 옆에서 연신 물수건으로 땀을 닦아 주고 있다. 한중위는 고병장을 이대로 두면 생명이 위험해질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을 감수하드라도 마달리 작전을 감행해야겠다는 생각이다. 마을에서 항생제를 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4일째 밤이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한중위는 두 대원을 앞에 모았다.

“내 판단엔, 들려오는 포성으로 보아 우리가 아야진 근방까지 밀려 내려간 걸로 생각된다. 마달리 작전을 한번 시도해보고 싶은데......, 어때?"

"마-마달리 작전요?"

두 사람이 동시에 한중위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소대장님, 마달리라면 저한테 물어보시죠이, 눈감고도 훤합니다요." 강상병이 얼굴에 환한 기운을 보이며 말했다.

"야! 강대연이, 마달리 신과부집 한두 번 안 가본 사람 어디 있냐."

변병장도 마달리 지리 정도야 훤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두 대원 모두 그간 비트생활에 갑갑해서인지, 아니면 전쟁터의 이판사판 배짱이 벌써 조금 붙었는지, 모두 환한 얼굴로 마달리 지리에 대해선 자신이 있다며 함께 가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한중위는 강대연과 함께 하기로 결정 했다. 강대연은 입대하기 전에 고향에서 꽤 알아주던 태권도선수였다. 눈치도 빠르고 행동도 민첩하다.

 

 

 

마달리 작전


 한중위는 강상병과 함께 비트를 빠져나왔다. 우선 시원한 밤공기를 마음껏 들이켰다.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키는 것 만 으로도 감옥에서 해방된 느낌이다.

 

숲길을 조심스럽게 헤치며 마달리를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마달리의 뒷산에 다다랐을 때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아카시아 숲에 일단 몸을 숨기고 동네의 분위기를 살폈다. 마을 앞쪽에 마을 회관이 있고 회관 바로 옆집이 마을 이장인 박씨 집이고 가장 뒤쪽에 위치한 집이 신과부집이다. 마을회관은 불이 밝게 켜져 있고 마당에 사람들의 움직임도 보인다. 신과부집 불빛이 조금 강하게 흘러나오고 있다.

 

신과부의 미니슈퍼 손님은 동네 주민들 보다 주변 부대에 있는 군인들이 많았었다. 군인들에게 간식용 상품이나 술을 팔아 제법 돈을 만져보는 재미를 보고 있었다. 인근 부대의 지휘관들은 신과부 슈퍼의 술 판매 때문에 병사들의 음주 사고가 발생할 때도 있어 그리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민간인 슈퍼로 군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중위도 이 슈퍼를 몇 번 방문하여 부대원들의 음주 현장을 적발한 적도 있었다. 한번은 다른 소대장들과 함께 저녁에 닭백숙을 시켜놓고 밤늦도록 술을 취하게 마신 적이 있다. 그때 신과부의 야릇한 미소가 취기를 부추긴 기억도 있다.

 

두 사람은 자세를 최대한 낮추고 신과부집을 향하여 조심스럽게 논둑길 아래로 접근해갔다. 담장 아래에 도착하여 엎드려 담을 넘어오는 소리에 온 청각을 집중했다. 집안에서 남자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마 가계 안에서 식사를 하든지 술자리를 벌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은 어둠속에 몸을 숨기고 슈퍼 안의 손님이 빨리 나오기만 바랄 뿐이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족히 30분은 넘었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신과부의 요염한 웃음소리가 한번 크게 들리더니 문 여는 소리가 났다. 집안에서 두 남자가 나왔다. 군인들이다. 두 사람 다 총을 메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병들로 보인다. 두 병사는 아래 마을 쪽으로 걸어갔다. 이때 앞에 가던 병사 하나가 한중위가 엎드려있는 담장 쪽으로 돌아섰다. 어둠속에서 순간적으로 머리를 지면에 대고 바짝 엎드려 복지부동의 자세를 취했다.

 

땅바닥에 닿은 가슴에 심장의 박동이 크게 온몸으로 전달되어왔다. 한중위는 눈은 상대를 주시하며 땅에 내려놓았던 소총을 살짝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돌아섰던 병사가 바지를 풀더니 오줌을 누고 있다. 놈과의 거리는 10보도 채 안되어 보인다.

 

 담 밑에 숨어있는 두 사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다. 오줌 누는 시간이 이처럼 길게 느껴지기는 난생 처음이다. 다행이 담 아래쪽을 쳐다보지 않고 바지를 올린다. 볼일을 다 본 후 돌아서더니 앞서가는 동료를 따라잡기 위하여 뛰어가기 시작한다.

 

두 병사가 마을 안쪽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을 담 밑에 엎드려 있었다.

한중위가 강대연에게 조용히 말했다.

 

“강 대연, 슈퍼에 놈들의 출입이 잦은 것 같으니 일을 빨리 마쳐야 될 것 같다. 내가 들어갈 테니 이곳에서 사주 경계를 해라,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집 마당으로 돌을 던져서 신호를 보내, 알겠지.”

 

말을 건네자마자 몸을 일으켜 담을 돌아 집 앞으로 나갔다. 강대연은 담장 밑에 몸을 숨기고 마을 쪽을 바라보았다. 마을 안은 죽은 듯이 적막이 흐르고 있다. 아주 멀리서 포성이 간간히 들려오고 오늘따라 하늘엔 별들이 유난히 총총히 빛나고 있다.

 

긴장과 초조한 기다림 속에서 잠시 여유를 가지고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강대연은 소대장의 작전 시간이 생각보다 지체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여름 전역하는 동향 선배 박병장을 축하해준다고 부대를 빠져나와 신과부 집에서 소주 세병을 깐적이 있었다. 그 때 얇은 브라우스  속으로 터질듯 부푼 신과부의 젓가슴을 훔쳐보며 욕정을 추스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너무 긴장을 하고 엎드려 있어서인지 갑자기 요의를 느꼈다. 일어설 수는 없고 쭈그리고 앉아서 앞 지퍼를 내렸다. 너무나 오랫동안 참아서인지 쉽게 나오지도 않았다. 방금 전 오줌을 누고 사라진 북한 병사 보다 도 더 오래 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갑자기 마을 쪽에서 남자의 말소리가 들렸다. 강대연은 볼일 도 다 끝내지 못한 채 바지를 재빨리 여미고 소총을 잡았다.

 

두 놈이 걸어오고 있다. 돌을 던져 한중위에게 위험을 알리려 해도 발 앞엔 마땅한 돌이 보이지 않았다. 좀 떨어진 곳에 작은 막대기가 보였다. 그러나 나무 막대기를 주어오기엔 시간도 부족하고 일어서면 틀림없이 발각될 위치이다.

 

벌써 20미터 앞까지 오고 있다. 한 놈은 소총을 어깨에 멘 것으로 보아 사병이고, 앞에선 놈은 허리에 권총을 찬 것으로 보아 군관이 틀림없어 보인다. 군관은 키가 작으나 뒤따라오는 병사는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가 제법 다부지게 생겼다.

 

결정을 해야 한다. 한중위가 아무것도 모르고 나오다 마주치든가 두 놈이 아무 경고 없이 문 열고 들어가면 끝장이다. 놈들은 벌써 10미터 앞까지 다가왔다. 결정을 해야 한다. 이미 한중위에게 신호를 보내기에는 너무 늦었다. 빨리 결정을 해야 한다. 강대연은 명령을 받아 임무를 수행한 적은 많았으나 본인이 이런 생사의 결정을 내려야하는 순간을 직접 맞이할 줄은 몰랐다.

 

결정했다. 강대연은 대검을 살그머니 뽑아 총에 착검을 했다. 두 놈은 무슨 말인가를 지껄이며 가게 문 앞으로 점점 다가가고 있다. 두 놈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슈퍼 문 앞 이라고 생각되는 순간 강대연은 몸을 재빨리 일으켜 세운 후 담 모퉁이를 돌았다.

 

군관이 문을 열려고 다가서고 병사는 뒤에 서있다. K2소총 개머리판이 북한군 병사의 목덜미를 정확하게 내리찍었다. 목뼈가 부스러졌는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병사가 힘없이 쓰러졌다. 앞에 섰던 군관이 놀라 뒤돌아보며 강대연의 눈과 마주쳤다. 군관은 돌발적인 상황에 넋이 나간 듯 2,3초 동안 강대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만 한다.

 

그는 늦게 상황을 판단했는지 권총집에 재빠르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군관의 손보다 강대연의 오른 발이 더 빨랐다. 휙 하며 내 뻗은 앞차기에 군관은 슈퍼 문을 들이박고 옆으로 고꾸라졌다. 군관이 넘어지면서 슈퍼 문의 철판이 떨어져 나가며 요란한 파열음이 났다.

 

신과부와 한중위가 깜짝 놀라서 밖으로 나왔을 땐 강대연은 군관의 가슴위에 착검한 소총을 들이대고 있었다. 신과부는 안색이 하얗게 변해서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소대장님 빨리 튀어야합니다. 이놈 어떻게 할까요?”

강대연이 말하면서 착검한 총을 들어 내리 찍으려한다.

한중위가 강대연을 밀치며 말했다.

 

“안돼, 데려가.”

한중위는 재빨리 군관 허리에 찬 붉은 가죽의 권총집에서 총을 빼내 무장을 해제시켰다. 쓰러져있던 군관이 상체를 일으키며 날카로운 눈매로 한중위를 올려다보았다. 한중위는 문 앞에 상추를 담아놓은 커다란 쇼핑백을 거꾸로 들어 쏟아버리고 그의 얼굴에 씌웠다.

 

이때 넘어져 정신을 잃고 있던 병사가 신음소리를 내며 움직임을 보였다. 강대연이 다시 착검된 총으로 내리칠 자세를 취하며 한중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죽일 필요까지는 없어.”

강대연은 넘어져 버둥대고 있는 병사의 머리통을 걷어찼다.

“자, 빨리빨리 움직여.”

두 사람은 북한군 군관을 앞세우고 어둠속을 헤집고 마을을 빠져 나왔다.

 

한중위는 비트 앞 계곡에 다다르자 계곡의 흐르는 물길 속으로 들어가 개울을 역류하며 산을 올랐다. 어느 영화에서 보았듯이 분명히 수색대가 수색을 나올 터인데 군견을 데리고 추적해오면 냄새의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한다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비트가 있는 언덕에 다다르자 이제 한시름 놓았다는 생각이 들어 돌아서서 멀리 보이는 마달리를 내려다보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불빛이 조금 밝아 보이는 걸로 보아 지금쯤 난리가 났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신과부의 신변에 분명히 문제가 생길 텐데, 떠나올 때 경황이 없어 한마디 인사도 못하고 온 것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정치장교 윤성만


세 사람이 비트에 들어가자 변병장이 기겁을 하며 반긴다. 강대연이 군관 포로를 뒤로 결박 지으려하자 군관이 몸을 비틀며 반항을 했다.

"야! 이 간나새끼 니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야, 앞으로 일주일이면 남조선은 우리 손에 떨어지게 돼있어, 그땐 니넨 모두.."

 

그러나 군관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강상병의 주먹이 바람을 가르며 군관의 명치 쪽을 찔렀다. 군관이 힘없이 몸을 앞으로 숙였고 강대연은 그의 두 손을 재빠르게 결박해서 20리터들이 철제 수통에 묶었다.

 

우선 인사불성 상태의 고병장의 치료가 급했다. 한중위가 윗주머니에서 약봉투를 꺼내어 변병장에게 건네며 말했다.

“신과부의 고마움을 잊어서는 않되, ..........정말 큰 일 해준 거야.”

 

한중위가 군관 포로의 머리에 덥힌 비닐 봉투를 벗겨주었다. 한 시간 가량 얼굴이 가려지고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던 군관 포로는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작은 눈을 더 작게 뜨고 좌우를 한번 둘러본다. 음침한 지하공간의 살벌한 분위기에 주눅 들기는커녕 작은 눈에 힘을 주어서 팔을 묶었던 강대연을 한번 쏘아본다.

 

한중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봐, 너는 전쟁 포로다. 우선 이름과 소속을 밝혀라.”

그러나 그는 아무 말 없이 한중위의 열굴 을 빤히 올려다본다.

“야 이 새끼야! 말이 안 들려.”

 

옆에 있던 강대연이 내려칠 기세로 고함을 쳤다. 군관 포로는 작은 눈으로 강대연을 한번 흘겨보더니 입을 굳게 다물고 앞만 주시하고 있다. 굳게 담은 입과 쏘는 듣 한 날카로운 눈빛은 비록 포로이지만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중위가 강대연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강상병, 군관인데 심한 욕설은 하지마라. .....이 봐 군관 동무 관등성명을 대야 이름을 불러줄 것 아닌가?”

잠시 동안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겨있던 군관이 또렷하게 말했다.

“조선인민군 378군부대 2대대 정치지도원 상위 윤성만이다.”

 

한중위가 재차 물었다.

“부대 임무와 부대 내에서 담당했던 임무는?”

 

윤성만이 말했다.

“..........말 할 수 없소.”

 

강대연이 다시 끼어들었다.

“소대장님, 이 자슥 아직 정신 못 차리고 있네요이.”

한중위가 강대연에게 조금 신경질 적으로 말했다.

 

“강상병, 됐다. 오늘은 그만 하자.”

한중위가 다시 강대연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상병, 한쪽 팔은 풀어줘라."

 

강대연이 한중위의 얼굴을 보며 멈칫거렸다.

"괜찮다."

전선줄로 꼭 묶여 있던 한쪽 손목을 풀어주자 윤성만은 손목의 패인자리를 주무르며 고마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좋다. 윤성만 상위 당신은 우리의 포로다. 제네바 협약에 의한 포로 대우를 하겠다. 그러나 허튼 수작을 하면 네 목숨을 보장 할 수 없다.”

한중위는 고병장 옆에서 약봉투를 정리하는 변병장에게 다시 지시를 했다.

 

"변병장, 물도 갖다 줘라."

변병장이 수통의 물을 건네주자 윤성만은 그간의 참았던 갈증을 단 번에 해소 시키려는 듯 수통을 입에 대고 벌컥 벌컥 계속 들이킨다.

 

강대연이 다시 한마디 던졌다.

“워메, 자슥 보게, 허벌라게 들이키네요이, 비상용 식수를 한 번에 다 마셔블면 으쩐당가.”

강대연이 일어서더니 대검을 뽑아들었다. 모두가 순간적으로 긴장해 바라본다. 강대연은 윤성만쪽으로 다가가 윤성만이 앉아있는 구석 시멘트 바닥에 1미터 정도의 금을 그었다.

 

“이봐, 지금부터 이선 안이 포로수용소 닝께. 금 밖으로 나오면 탈출을 시도허는 걸로 간주할껴, 알아들었제. ”          

 

 

 

마지막 휴가의 추억


윤성만은 풀어준 왼쪽 팔을 무릎위에 얹은 채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벽만 바라보고 있다. 몇 일 동안 4명이서 벽 만 바라보며 생활을 하다가 불청객 한사람 늘어나니 분위기가 사뭇 어색해졌다.

 

한중위는 눈을 감았는지 떳는지 알수없는 상태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윤성만을 말없이 오랫동안 내려다보고 있다. 동생 성희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 밖에 없는 귀여운 여동생이다. 첫 휴가를 나갔을 때 성희는 막 대학교 2학년이 되어있었다. 거실에서 함께 TV 사극을 보다 작은 논쟁이 있었다. 이제 성희는 귀엽기만 하던 여동생이 아니었다.

 

"오빠는 철학을 전공했으면서도 역사의식이 전혀 없어요. 해방 이후 한국의 현대사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땜에 꼬인 거예요. 반민족 세력들이  일제 식민지 잔재 청산 없이 반공을 내세워 독재 체제를 구축한 게 아닌가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구요. 아직까지도 그 잔당들이 남아서 주체성도 없이 미국의 패권주의 앞에 꼬리를 내리고, 자주적 통일운동을 벌이는 인사들을 빨갱이로 몰고 탄압을 일삼고 있는 거 라구요."

 

한중위는 모처럼 나온 휴가에서 동생 성희와 피곤한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성희처럼 다듬어진 역사관으로 무장되어 있지도 않았다. 좀 더 폭넓은 사고의 세계로 나서지 못하고 복잡한 사회문제를 편향된 인식으로  바라보는 동생이 답답하기만 했다. 대학생이 된 성희가 너무 많이 변한 모습이 조금 걱정스러웠다.

 

성희의 주장대로 탄압받고 홀대받는 민중들이란 탐욕적인 거대자본의 위력 앞에 힘없는 노동자들이며 시장원리라는 이름으로 복종을 강요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경쟁 만능주의의 냉혹한 칼날 앞에 창공을 날아보지도 못하고 힘없이 추락하는 젊은이들은 경제 능력 없는 자본주의의 무능한 인간으로 낙인찍혀 살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경쟁의 사회에서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일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 한다. 그러나 요즘 들어 구조적으로 끊임없이 발생하는 무한경쟁의 탈락자들, 이들이 뿜어내는 한숨과 분노를 이 사회가 제대로 풀어주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10년 넘게 경영하시던 작은 슈퍼도 전철역 부근에 새로 대형 할인마트가 들어선 이후로 매출이 크게 줄어들었다 한다.  가계를 내 놓은 지가 반년이 넘었으나 아직 정리가 되지 않고 있다는 아버지의 한숨어린 푸념을 들은 것도 지난 휴가 때였다.

 

정글 자본주의가 활개치고있는 요즘의 모습은 오직 양육강식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강자 독식의 세상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본주의 시장 커다란 연못에도 메기 붕어 새우같은 작은 물고기들과  진흙 속의 미꾸라지까지 모두 자기의 영역을 지키며 공생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한다. 작은 물고기들이 모두 사라지고 먹이사슬 맨 위에 있는 가물치 몇 마리 만 살아남아서 연못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닌다면,  그 연못을 제패한 가물치도 결국은 얼마가지 않아 굶어죽게 된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지 이해가 안된다.

 

지난 달 마지막 휴가 때 성희가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면회도 못하고 귀대했다.

 

 

 

한중위는 변병장에게 비트내 식사에 관련된 지시를 내렸다.

"변병장, 지금부터 음식을 끓이거나 냄새를 풍겨선 절대 안되, 이제부턴 배식은 건조된 전투 식량 만으로 한다. 알았지"

 

"예, 소대장님, 그런데, 저, ..., 식구도 하나 늘었고, 지금 상태론 절약해도 5일 정도 밖에 못 버팁니다."

"알아, 오늘부터는 하루 두 끼 씩 만 배식 하도록 해"

 

윤성만은 이제야 피곤함이 몰려오는지 꼿꼿하던 자세가 무너지고 철제 물통에 등을 받치고 밀려오는 졸음을 참아내고 있는 모습이다. 한중위도 이제 고병장이 내던 신음소리가 조금 잦아드는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며 자신도 지금까지 참아왔던 수마가 한꺼번에 밀려오고 있음을 느낀다.

 

 

한중위는 목이 답답함을 느끼고 눈을 떴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졸고 있던 윤성만이 어느 틈에 수통에 결박된 한쪽 팔을 풀었는지 가슴에 올라타서 목을 조르고 있다.

 

"야! 이... 무슨 짓."

한중위는 재빨리 오른손으로 윤성만의 왼손을 잡아 비틀었다. 그러나 윤성만의 오른손이 점점 더 목을 조여온다. 소리처서 강대연을 깨우려 해보나 목구멍에선 바람소리만 나온다. 윤성만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날카롭게 찢어진 눈에선 야릇한 미소와 함께 살기가 내리꽂는다.

 

"이... 간나, 미제의 앞잡이 놈."

윤성만이 독기품은 얼굴로 내려다보며 내뱉었다.

 

아! 녀석을 살려주었더니 결국, 나쁜 놈 배은망덕한 놈, 안 돼. 가까스로 숨을 한번 몰아쉬고 윤성만의 졸라오는 두 손을 받아 쳐냈다.

 

 언제 들어왔는지 동생 성희가 내려다보고 있다. 아! 동생 성희가 오빠를 구하려 달려왔구나.

"성희야, 날 좀 빨리..."

막힌 목구멍을 간신히 조금 벌리고 외쳤다.

 

그러나 성희는 바라만 보고 있다.

"성희야, 오빠다. 숨이 막힐 것 같다. 어서 이 녀석을 좀..."

 

그러나 성희는 비웃음 같은 미소를 지으며 처다만 보고 있다.

윤성만은 점점 힘을 더해오고 한중위는 온몸을 다해 발버둥 쳐본다. 언제 옷이 벗겨졌는지 아랫도리는 알몸이 된 상태다.

 

"안되, 정말... 안되."

성희가 발가벗겨진 오빠의 알몸뚱이가 보기 싫었는지 모포 한 장을 던져 가려주었다.

 

"그래, 성희야 고마워."

동생 성희가 부끄러운 곳을 가려주어서 다행이다. 이젠 이놈을 밀어내기만 하면 된다. 한중위는 짓누르고 있는 윤성만의 오른 팔을 온 힘을 다해 비틀어 밀쳐냈다.

 

'콰당'하며 한 순간 지하 공간을  꽉 채운 소리에 모두들 놀라서 잠에서 깨어났다.

윤성만이 철제 물통에 기대어 졸다가 물통이 넘어지며 낸 소리였다.

 꿈이었다.


희망의 불빛


역시 항생제의 약효는 놀라웠다. 고병장은 캡슐을 두 알 씩 세 번을 복용하고 나서 열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다음 날부터는 체온이 정상 가까이 돌아왔다. 이제까지 누워만 있었던 고병장도 몸을 일으켜 앉은 상태로 식사를 할 정도로 회복이 되어가고 있다.

 

3일이 지나자 당초에 가장 우려하고 두려웠던 적의 수색 활동에 대한 공포감도 조금은 해소되어가고 있다. 한중위의 치밀하고 철저한 대처 방법이 위험에서 구했다고 모두들 믿고 있다.

 

 

지난 3일 동안 엄청난 변화도 있었다. 우선 모두가 흥분할 정도로 반가웠던 일은 바로 중대장과 무전 교신이다. 예비 주파수에 중대장과의 교신이 이루어졌다.  바깟 세상과 통신선을 연결한 것 만 으로도 대원들에게 커다란 용기와 희망을 준다.

 

본부의 상황은 추측을 하고 있었던 상황과 같았다. 전쟁 발발 첫날 아군은 적과의 교전에서 참혹한 피해를 당하고 전선에서 20킬로나 밀려난 상태다. 한중위가 맨 처음 물어본 것은 부소대장 인솔 하에 후방으로 이동한 소대원들의 생사 소식이었다. 모두 23명이 출발 했는데 지금까지 본부에 합류한 대원이 15명 뿐 이라한다.

 

 

비트내의 생활에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인간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관계의 형성이다. 적진 속의 좁은 지하 공간, 적의 수색작전에 발각되면 곧 죽음이라는 공포와 초조함의 연속이다. 그러나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도 구성원 간에는 보이지 않는 교류가 일어나고 조금씩 관계가 만들어지고 하나의 작은 공동체가 형성되고 있다.

 

말하지 않고 보이지 않아도 미움과 사랑, 공포와 희망, 존경과 증오가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다. 공포의 적막 공간이지만  각자의 오감을 통한  미세한 신경돌기는 상호간 교류를 통해 조금씩 뇌 속에 입력되어지며 다른 사람에 대한 이미지와 관점을 형성해가고 있다.

 

새로운 변화의 발단은 북한군 정치지도원 윤성만 상위가 공동체에 합류함으로서 새롭게 발생하는 당연한 결과였다.

 

 비트는 사생활이 빠짐없이 노출되며 철저하게 개방된 공유의 공간이다. 포로인 적과 동침을 하고 있으니 대원들만의 비밀이야기를 별도로 나눌 수도 없다. 고병장이 잠자기 전에 올리는 기도와 한중위의 작은 숨소리까지 모두 함께 공유하고 있다.

 

이틀이 지났을 때 한중위는 윤성만의 묶여있던 나머지 한 쪽 팔을 풀어주라고 강상병에게 지시하였다. 강대연은 탐탁하지 않은 표정을 지었으나 소대장의 지시에 따랐다.

 

 한중위는 윤성만에게 비록 매트리스가 깔리지 않은 시멘트 바닥이지만 전투식량 박스와 비닐 봉투를 활용하여 바닥에 깔아 습기가 올라오지 않도록 하고 담요도 한 장 내주어 잠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어제부터는 한 끼의 식사량을 반으로 줄였다. 그러나 모두 균등하게 배식하고 있다. 다만 한중위의 지시로 환자인 고병장에게 만 특식이 제공되고 있다.

 

윤성만은 강대연을 표면적으로는 가장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있다.  그것은 신체적인 위협이다. 윤성만은 강대연이 그의 부하를 개머리판 한방으로 제압하는 괴력을 지켜보았고, 건장한 근육질 체격에서 터져 나오는 발차기의 위력을 직접 당해보았다.

 

강대연이 보여주는 철저한 임무수행 위주의 군인 정신과 북한군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함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강대연은 작은 공간 안에서 포로 수용소장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한중위는 윤성만을 풀어주면서 강대연 역할을 예상하고 있었다. 합류 첫날 윤성만이 잠자리에서 잘못하여 그의 발이 경계선 밖으로 나왔을 때 강대연이 일어나 발길질로 선 안으로 차 넣은 일을 잠결이었지만 잘 알고 있다. 또한 윤성만은 강대연이 잠자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항상 경계의 눈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음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다.

 

윤성만이 내심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은 한중위이다. 그는 작은 체구에 안경까지 끼고 있어 군인답지 않은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이다. 그러나 윤성만이 관찰한 한중위는 부드러움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고 안에는 냉철하고 단호한 결단력이 감추어져있음을 알고 있다. 윤성만이 처음 붙잡혔을 때에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데려가'하며 강대연에게 명령을 내렸다.

 

윤성만은 한중위보다 두 살 이나 위다. 그러나 그와 함께 3일간 생활하면서 두려움의 근원지를 찾아가보면 한중위가 보여준 결단력과 치밀성 그리고 포용력에서 나오는 내면의 무게에 있다. 엄연한 적군이지만 같은 군관으로서 조금은 존경심까지 느끼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성만이 가장 친밀감을 느끼면서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고경대 병장이다. 그는 이제 일어나 앉아 대화를 나눌 정도로 회복이 되었다. 그가 누워있는 동안에 변병장으로 부터 지극한 간호를 받고 있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북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뜨거운 동료애는 어느 집단이나 동일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고경대는 변은석이 만들어준 꽁치 통조림의 특식을 입맛이 없다며 남기고 윤성만에게 주었다. 윤성만은 한중위도 맛보지 않는 음식을 혼자 먹을 수 없다는 부담감에 처음엔 사양했다. 그러나 고경대의 두 번째 호의는 물리치지 않았다. 그도 역시 몇 일간 입에 안 맞는 소량의 군용식사에 식상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고마웠던 일은 고병장이 덮고 있던 담요 한 장을 빼내어서 강대연을 통해 내려준 일이다. 그동안 한 장의 담요로 찬 시멘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두 장의 담요는 그런대로 습기와 냉기로부터 지친 몸을 왼 만큼은 보호해주고 있다.

 

가장 놀랄만한 사건은 고병장이 윤성만을 '윤상위님'라며 계급과 존칭을 불러준 일이었다. 윤성만은 지금까지 포로 대접을 받으며 군관으로서의 특별한 대접을 받고자 요구하지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갑작스런 고병장의 호칭에 모두들 놀라움에 고병장의 얼굴을 주시하였다. 모두 말은 없었지만 당연히 한중위가 어색한 상황을 정리를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중위는 그 일에 대하여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호칭 사건으로 가장 자존심이 상하게 된 사람은 강대연이다. 지금까지 거친 반말을 사용해왔는데 고참 선배의 경어사용에 딱히 대응할 말이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한중위가 아무 언급이 없는 상태에서 고병장에게 불만을 토로하기도 어렵다.

 

 이 사건 이후로 강대연의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윤성만에게 작은 지시라도 할 때에는 말 보다는 고개 짓 이나 표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 윤성만에게 도 고경대에 대해 정말로 이해 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그가 식사를 하기 전에 항상 두 손을 앞에 모으고 기도를 드리고 나서 '아멘'하며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을 윤성만의 사고 체계로는 도무지 해석 해내기가 쉽지 않았다.

 

나중에 고경대가 잠자기 전에도 항상 일어나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작은 소리로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몇 번 보고서야 그 일이 기독교인의 종교 의식인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방안에서 고경대를 빼고는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한중위를 포함한 누구도 고경대의 이런 행위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직도 윤성만이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다.

 

별도의 주어진 임무도 없이 다만 긴장과 초조함 속에서 시간이 흐르기만 바라는 지하 공간에서의 3일간은 한 달 보다도 더 길어 보이고 일 년 보다 도 더 지루하게 느껴진다. 그 것은 시간을 나누는 기준의 잣대가 없기 때문이다. 잠자는 시간이 따로 나누어져 있지도 않고 식사 시간도 정해져있지않다.

 

누구도 말이 없으면 작은 공간엔 어둠과 침묵만이 지배한다. 이제는 적군과 아군이라는 구분도 어느덧 희미해져가고 있다. 강대연의 경계의식도 몰라보게 퇴색했지 만, 윤성만의 적대감도 엷어져 이제는 한 솥밥을 먹는 한 식구가 되어버린 느낌이 들고 있다. 윤성만은 더 나아가서 공동운명체의 동료의식으로 발전하여 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마음 속으로 놀라곤 한다.

 

 

소통의 끄나풀


무거운 침묵이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을 때 윤성만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해수란 사람을 아시오?”

 

아무도 말이 없이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때 한중위가 말했다.

“그 사람, ........우리나라 국회의원 말하는 거요.”

“맛수다, 그 남조선 사람 내가 심문 했수다레.”

 

“당신들이 국제법을 어기고 억류한 의원과 관광객들 아냐, 나쁜 놈들 같으니라고.”

지금 까지 참고 지냈던 강대연이 흥분해 말했다. 한중위가 강대연을 바라보며 흥분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은 후 윤성만에게 말했다.

 

“그래 그 사람들 어떻게 하였소?”

"남조선 국회의원 두 명은 내가 직접 심문하였소, 긴까니 이해수 그치는 남조선에서 장관을 지냈다며  거들먹거리고 심문에 애를 먹여 무릎을 꿀렸드래더니 고분고분 해집디다.“

 

북한군 정치장교 윤성만의 자발적인 증언을 통하여 대한민국 국회의원 두 명의 소재와 억류된 관광객들의 분산 수용 장소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를 획득 할 수 있었다.

 

한중위는 이 정보를 윤성만이 보는 앞에서 무전으로 본부에 송신하였다. 윤성만도 이 정보내용이 공화국을 배반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한 식구로서의 최소한의 보답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중위는 본부로부터 윤성만을 추가 심문하여 필요한 다른 정보들을 보낼 것을 요청했으나, 더 이상 윤성만에게 정보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중위는 윤성만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북은 왜 또 남한을 침공하였소?”

 

“그것을 몰라서 질문 하는 게요, 남조선과 한패거리인 미 제국주의 놈들이 우리 공화국에  폭탄을 퍼부은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요.”

 

“음.........., 그것은,.... ,북에서 핵폭탄으로 남을 위협하기에 민족의 비극을 사전에 제거하기위한 방어적 수단이었소. .....설사 미국의 잘못을 인정하더라도 동족인 남을 선제공격하여 또 한 번의 동족상잔을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북의 책임이요.”

 

“공화국은 남조선을 해방시켜야할 책임을 가지고 있소.”

“누가 누구를 해방시킨다는 말이요.”

 

“남조선 인민들을 미 제국주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준다는 말이요.”

“.............., 좋소, 해방 시킨 후엔 어떻게 할 계획이요?”

 

“노동자 농민이 주인이 되는 평등한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하는 것이요.”

“그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으시오?”

 

“....................................”

두 사람 간에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한중위가 머리를 들어 빈 천정을 바라보며 먼저 침묵을 깼다.

 

“6.25 전쟁 이후, 북에서 먼저 그런 세상을 만들어 남쪽 동포들에게 증명해 보였어야 했소 .............,, 사회주의가 인간의 본능과 이성에 대한 성찰에 오류가 있었음은 벌써 오래 전에 증명이 되었소. 북에서만 인정하지 않고 허송세월을 한 것이 또 한 번 민족의 비극이 시작된 원인이라 생각하고 있소.”

 

“음........,”

윤성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전쟁에서 북이 이길 것으로 믿고 있소?”

한중위가 다시 윤성만에게 질문을 던졌다.

 

"......................"

또 한 번의 단절이오고,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고, 침묵이 지나 갔다.

 

“우리는 사회주의 건설을 위하여 마지막 한 사람까지 총폭탄이되어 싸울 결전의 의지를 가지고 있소”

윤성만이 조금은 결의에 찬 어조로 한중위의 질문에 답했다.

 

“흠..............,, 북에서 승리한다 해도 남조선 인민 5천만 명을 통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소?”

 

“...........................................................................”

또다시 말이 끊기고 침묵이 계속되었다. 윤성만은 한중위의 계속되는 질문에 더 이상 답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한중위의 질문 이전에 남쪽의 마달리라는 연선지역  산골 마을을 통해 받아들인 윤성만의 충격은 이 전쟁이 잘못된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한중위는 아침 교신에서 전세가 아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어 가고 있으며 북한군이 머지않아 종전 협상에 임할 것이란 기쁜 소식을 중대장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변은석병장이 계곡에서 물을 떠가지고 왔다. 포성이 가까이서 들리는 것으로 보아 아군이 대진항 정도까지 밀고 올라온 것 으로 생각된다고 말한다. 모처럼 모두들 밝은 표정이다.

 

변병장은 비트 앞 언덕에서 꺾었다며 산 나리꽃 한 송이를 손에 들고 들어와 수통에 꽂아 소총을 세워놓는 간이 총가 위에 올려놓았다. 희미한 불빛이지만 검은 점이 드문드문 박힌 주홍색 꽃잎이 환하게 웃으며 방안을 내려다보고 있다.

 

저녁에 중대장과 2번의 교신이 있었다. 이번에도 반가운 소식이다. 북이 전쟁의 패배를 인정하고 26일 0시 까지 전쟁 전 휴전선 이북으로 군대를 완전 철수한다는 조건에 서명을 했다 한다.

 

 지난 20일을 기점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북의 전쟁 지휘부가 정전협상에 속도를 내기시작 하였고, 지휘부도 자중지란에 들어가 붕괴의 조짐도 보인다는 설명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전의를 상실한 북한군이 투항 및 귀순을 해오는 병사가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도 전했다. 더불어 한중위가 보호하고 있는 윤성만에 대해서도 한중위 책임 하에 귀순의사 타진을 해 보라는 지시도 있었다.

 

한중위는 대원들과 윤성만에게 중대장에게 전해들은 종전의 상황에 대하여 요약하여 전달해주었다. 그러나 윤성만에게 귀순 면담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지시한 사항은 26일 0시 이전 까지는 비트 밖으로 나가는 것은 위험하니 답답하더라도 앞으로 34시간을 잘 참아내자는 말을 잊지 않았다.

 

생각하면 지금까지 두더지 굴 같은 지하 방에서 모두가 잘 참고 견디어냈으며, 죽음의 절벽 끝자락에까지 몰렸던 상황도 여러 번 있었다. 이제 34시간 만 지나가면 모두가 밝은 태양빛 아래 시원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킬 수 있다. 


 

 

슬픈 산나리꽃


전쟁이 끝난다는 일은 모두에게 기쁜 소식이다. 그러나 이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몇 시간이 흐르고 부터 비트 안의 분위기는 정 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모두가 점점 말수가 줄어들더니 무거운 침묵의 시간이 조금씩 길어져가고 있다. 너무 갑자기 찾아온 큰 기쁨 뒤에 오는 허탈감인지, 아니면 팽팽하게 임계점까지 늘어났던 긴장감이 한순간에 풀려버린 반발력 때문인지, 실내에는 말할 수 없는 침울한 적막감이 깊게 드리워져있다.

 

모두가 총가 위에 놓여있는 나리꽃을 바라다보며 생각에 잠겨있다. 동일한 대상을 바라보고 있지만, 대상물에 대한 인식의 방법은 관찰자 마다 상이하다. 각자의 느낌은 제각기 다른 감정의 변화를 타고 서로 다른 표현물을 만들어가고 있다.

지금까지 전쟁이란 특수상황에서 본능적 판단에 의해 이루어져왔던 행위들에 대하여 이성적 잣대로 검증해보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 앞으로 전개될 불확실하고 불안한 미래에 대처하기위한 각자의 대응 방안을 구상해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나리꽃에 눈길을 고정한 채로 가장 깊은 사색에 들어간 사람은 윤성만이다. 그의 고뇌는 한중위가 북한군의 후퇴 소식을 전해주기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인간의 본능과 이성의 성찰에 대한 오류'가 사회주의 붕괴의 원인이라 말했을 때도 정치지도원 군관으로서 아니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한사람으로 반론을 제시할 자신감이 없었다. 그가 사회주의 혁명정신과 주체사상이란 창과 칼 로 무장한 중세의 말 탄 장수라면 한중의의 성은 총포로 무장된 요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남조선의 의원과 관광객을 심문하는 과정, 속속들이 들여다본 남조선의 산골마을, 그가 만난 시골 농부와 상인들, 심지어 그들이 내뱉는 남조선 정부에 대한 불평 불만 내용을 통해서 남조선 인민들의 의식 수준과  현장의 속살까지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곳 지하에서 7일간 이들과 함께 하면서 윤성만은 그가 지금까지 보검이라고 쥐고 있던 칼이 구시대의 무기임을 인정하였다.

 

허망하고 허탈하였다. 지금까지 꿈속에서 살았단 말인가? 공화국은 지금까지 무었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우리가 세웠던 강성 대국은 정녕 모래위의 성 이었단 말인가? 강철 대오로 뭉쳐 마지막 한사람까지 총폭탄 되자던 인민군대의 의지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강대국들의 독점물이었던 핵폭탄도 개발하여 이제는 어느 누구도 공화국을 넘볼 수 없는 강성 대국의 문턱을 넘어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윤성만은 생각할수록 머리가 혼란스럽고 어디서부터 이런 오류가 시작되었고 어디서 끝을 보게 될지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고 있다.  

 

 

한중위도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 부하 대원들에 대한 그의 조치가 적절하고 올바른 판단이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개전 초기 적의 포격에 의한 4명의 전사는 불가항력이었다 하더라도 본인이 직접 대원을 지휘하였다면 희생을 줄이지 않았을까? '괴목작전' 임무수행에 너무 집착하여 대원들을 분리하려했던 집착이 희생을 크게 만든 원인은 아닐까?

 

한중위는 먼저 이번 전쟁의 근원과 우리민족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는 왜 서양인들이 만든 이데올로기의 첨병이 되어 또 한 번의 동족상잔을 치러야하는가?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 이념들도 역사 앞에서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초월하지 못하는 한계를 경험하지 안했던가? 왜 우리만 수 백 년 동안 도그마의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반복된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일까?

 

이 전쟁이 남긴 의미는 무엇인가? 비록 단기간에 끝난 국지전이지만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전쟁의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하는가? 미국의 잘못된 정보 판단 때문인가 아니면 미국에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 숨은 흉계 때문인가? 북의 호전성이 원인인가? 그럼 앉아서 당한 우리 정부는 죽어간 국민들에게 아무 책임도 없이 남의 탓으로 돌려야하는가? 전쟁을 방지하지 못한 책임은 누가 어디까지인가?

좀 더 근본적인 질문에도 답을 구해보려 하였다. 누가 전쟁을 원 하는가? 국민들이 전쟁을 바라는가? 군인들이 전쟁을 바라는가? 권력에 대한 의지가 전쟁의 원인이라면, 이번 전쟁에서 권력의 욕구가 가장 강했던 자는 누구인가?

 

전쟁이 몰고오는 인간 이성의 마비와 집단 환각 현상은 인류 역사가 아무리 지속된다해도 영원이 치유될 수 없는 고질병이란 말인가?

전쟁은 악인가 선인가? 전쟁이 폭력이란 이름의 악이라면 이 악을 몰아내는 것 또한 더 강한 폭력을 동원한 전쟁이 아닌가? 정의로운 전쟁이 존재하는가? 승리한 전쟁은 선인가? 전쟁 없는 인간 사회가 존재한 적이 있는가? 결국은 같은 민족 국가  부족이라는 이름의 거룩하고 성스런 명분 속에서 반짝이는 인간의 이기심이 악의 근원이란 말인가?

 

이기심이란 인간의 원초적 본능, 신은 왜 인간에게 이기심의 유전자를 심어 놓았을까? 분명히 뜻이 숨어 있을 것이다. 단지 인간들이 찾으려하지 않고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끝없는 물음들과 씨름을 하고 있지만 그 물음들은 자꾸 돌고 돌아서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총가에 올라앉아 두개의 이파리를 몸통에 붙이고 시들지 않으려 안간힘을쓰고있으나 점점 아래로 힘없이 처져 내려가는 산 나리꽃이 슬프게만 보인다. 몇 시간의 침묵이 더 흘렀을까, 고병장이 답답한 적막 공간에 숨이 막혔었는지 말문을 열었다.

 

“윤상위님, 북한에 가기 싫으시면 저 허구 함께 당진에 내려 갈래유. 한우나 돼지를 키워바유. .......잘만 허면 도시 생활보다는 훨씬 낫구만유. 집에서 한우 50여 마리 돼지 300여수 키우고 있는디 괜찮구먼유, 일손이 달린다며 걱정이 많어유.”

산 나리꽃에 눈을 떼지 않고 과거와 미래의 세상을 타임머신을 타고 목적도 행선지도 없이 넘나들고 있던 윤성만은 '윤상위님'이란 말에 깜짝 놀라서 현실로 복귀하였다.

 

“...........음 ......., 뭐, 내래, 아직...........”

“몸만 오면 되유. 묵으시기에 불편하시지 않을 방도 두개나 벼있구만유.”

 

“........내래, 농사일은 해본지 오래되었고, ................소나 돼지 키우는 일도 기술이 있어야하지 아무나 합네까?”

 

“저도 복학해서 한학기만 마치면 졸업인디 ....., 졸업허면 농장에 붙어서 일할 작정에유, 요즘 농촌엔 젊은이가 없어서 사람 구하기가 하늘에서 별 따기만유 .”

 

강대연이 끼어들었다. 열흘이 넘도록 면도를 하지 않아서 구레나룻과 턱수염이 족히 1센티가 넘도록 자랐다.  언젠가 사극에서 본 임꺽정 분장 모습이다.

 

“소 돼지 똥 냄새 맡아가며 촌에서 고생해 봤자 별 볼일 업드라고, 어려우시면 담양와서 용호도장 강대연이 차지쇼이, 담양에서 강대연이 모르면 간첩이제. 나가 이리 뵈도 의리 하나 가지고 살아가는 놈 이랑께."

 

강대연은 태권도 실력과 의리의 사나이라는 자존심을 은근히 내보인다.

“야, 대연아 알았다. 알았어, 대한민국에서 네 의리 모르는 사람 없으니 그만해라.”

 

변병장이 강대연의 의리론이 또 나오기 시작하자 여러 번 들어서 지겹다는 말투로 말했다.

“변병장님 지금은 군발이 아닙니까? 임무에 충실해야죠이. 윤대위님이 저희 큰 형님 나이드마, 군복 벗으면 지도 확실하당께요.”

 

강대연이 드디어 윤상위에 대한 호칭을 바꾸었다. 그간 두 사람사이에 걸려있었던 쇠 빗장이 벗겨져 나갔다.

한중위가 말했다.

“강상병말이 맞다. 변병장 나리꽃이 점점 시들어 가는데 수통에 물 갈아주어야지.‘‘


 

 

돌아가는 길


한중위는 일부러 서두르지 않았다. 아직 다 건너가지 못한 패잔병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두들 비트 밖으로 나왔을 때는 벌써 해가 중천에 떠있다.

 

윤성만이 묘지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고 비트의 출입구를 위장한 상석을 유심히 살펴본 후에 놀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남조선 동무들도 대단하구 만요. 놀랍습네다.”

 

정말 오랜만에 마음껏 들이켜 보는 맑은 공기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10시가 조금 지났는데 벌써 열기가 느껴지는 무더운 날씨다. 모두들 그동안 묵었던 비트를 막상 떠나자니 조금은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고병장을 위해서 들것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항생제로 간신히 버티어왔으나 더운 날씨에 상처부위가 썩어 들어가면 큰일이다. 가능한 신속하게 병원으로 후송시키도록 해야 한다.

 

한중위가 앞장을 섰다. 7번 도로로 가장 빨리 나가기 위해선 마달리 방향이 아닌 험한 산길이더라도 직선 코스를 택하였다. 변병장과 강상병이 고병장을 들것에 뉘였다.

 

산길 2킬로 정도를 내려오는데 거의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갈대밭 넘어로 멀리 7번 국도가 보인다. 군 트럭 3대가 남으로 내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금강산 관광객을 위하여 2003년도 에 새로 잘 닦아 놓은 포장도로다.

갈림길이 나왔다. 모두들 멈춰 섰다. 고병장이 실린 들것도 땅에 내려놓았다.

 

한중위가 윤성만에게 돌아보며 말했다.

“결정하셨습니까? 저희와 함께 가려면 우측으로 서시고, 북으로 가시려면 좌측 길을 따라 올라가면 됩니다.”

윤성만이 한중위의 얼굴을 말없이 한참 쳐다본다.

 

“고맙습네다. ............어케 합네까? .....내레 기래도 가봐야디오.”

모두들 윤성만의 얼굴을 바라다본다. 윤성만의 눈에 이슬이 맺히는지 고개를 북으로 돌려 하늘을 한번 올려다본다. 모두들 아무 말 없이 윤성만을 바라다보고 있다.

 

이때 한중위가 배낭 안에서 포장지에 둘둘 말려있는 묵직한 물건을 하나 꺼내어 윤성만에게 건네주었다. 윤성만이 물건을 꺼냈다. 권총이다. 윤성만은 권총을 허리에 차고 가슴을 한 번 쫙 펴보인다.

 

“역시 권총은 윤상위님이 잘 어울리니네요이.”

강대연이 말했다

 

“갑시다. 가서 우리 민족이 짊어진 멍에를 우리 세대에 벗어버리도록 다시 한 번 노력해 봅시다.”

한중위가 말했다.

 

윤성만이 돌아서 터벅터벅 갈대밭 사잇길로 걸어가고 있다.

“윤상위님 소 키우고 싶으면 언제라도 당진에 내려오세유.”

고병장이 이미 멀어져간 등 뒤에 대고 독백처럼 말했다. 모두들 윤성만이 갈대숲에 가려 안보일 때까지 지켜보았다.

 

“우리도 빨리 가자.”

한중위가 발길을 재촉했다

 

(끝)

2009년 7월 21일 '성산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