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전망대 유감
이곳은
불과 얼음이 함께 하는 곳
60년 긴 세월
불은 얼음을 녹이지 못하고
얼음도 불을 끄지 못했네
송도 파도소리 억만번 외쳐도
구선봉 붉은 바위 그대로
높은 철책 한 줄이 두 줄 되도
뛰어넘어 문두드리고
전망대 오르는 길
장사꾼 호객소리 만 가득
(2013.8.20)
유감1.
휴전선 155마일 여러 곳에 전망대가 있다. 그 중에서도 휴전선 동과 서 맨 끝에있는 두 전망대는 특별하다.
이 전망대엔 많은 이들이 찾아온다.
이곳은 단순히 여행객들이 한번 들려 못 넘어가는 북한 땅을 한번 쳐다보고 내려오는 전망대가 아니다.
이곳은 우리 민족의 통한이 서린 장소다.
이 곳을 찾는 많은 관광객 중에는
전쟁 전 떠나온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있고,
2세대가 지나도록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총부리를 서로 맛대고 악담을 해대는 민족의 슬픔을 괴로워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또 앞에 보이는 DMZ에서 젊은 시절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며 군 복무를 마치고 나온 노병들도 있을 수있다.
많은 이들이 전망대에 올라 철책선 너머로 바라보이는 또 하나의 우리 땅을 바라보면서 각자의 회상에 잠긴다.
나는 동해안을 찾을 때 마다 꼭 이곳 통일전망대에 들러 나만의 감회에 잠기곤 한다.
이번에 와보고 완전히 달라진 이곳의 분위기에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꼇다.
이 비극의 장소 통한의 장소 성스런 장소를 장사꾼들의 장터로 만들어 놓았다.
제대로 된 민속품도 아니고 토산품도 아닌 허접한 물품들을 판매하는 상인들이 위층 전망대까지 점령해 호객행위를 하고있다.
이곳의 시설 관리가 군에서 민간으로 이관되었다는 생각이들었다.
제대로 정신이 밖히고 생각있는 단체장이라면 이런 모습을 보고 있지 않을것이다.
이런 혼 없는 사람들이 있으면 통일의 그 날이 온다해도 우리 민족의 장래는 밝지않다.
유감2.
"전투에 패한 장수는 용서받을 수있지만 경계에 실패한 장수는 용서받을 수없다"
군에서 경계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많이 인용하는 말이다.
아무리 유능한 지휘관 도 적의 우세한 병력이나 화력의 격차로 전투에서는 패할 수 있다.
그러나 경계란 책임감있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면 허망한 실책은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155마일 휴전선은 경계부대다. 항상 경각심을 가지고 경계 임무에 충실해야한다.
모든 병사와 지휘자들이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면 어이없는 실책은 나올 수 없다.
얼마전 '노크 귀순'이란 경계가 뚫리는 어이없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내가 군 생활시 경계 임무를 부여받았던 섹타에서 발생했다.
이 사건을 접하고 초소장을 먼저했던 선배 로서 부끄럽게 생각하고있다.
유감3
동해안 통일 전망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사전에 신고 절차를 거쳐야한다.
휴전선에 근접하기에 군사 보안과 방문객의 안전 관리를 위해 당연한 절차로 받아들인다.
신고 절차를 마치면 모두다 영화관에서 영상으로 제공하는 보안교육 영화 한 편을 보아야한다.
요즘 보통의 국민들은 스마트폰으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받아본다.
북한의 실정과 정책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알고있다.
보안 교육 내용이 웃기고 가관이다. 국민의 의식 수준을 못따라간다. 1970년대 시골에서 상경한 노인에게 반공 교육시키는 수준이다.
군에서 하는지 민에서 주관하는지 모르지만 이런 한심한 프로그램을 관이란 권력의 힘으로 아직 유지하고있다.
이런 일을 강제하면서 세금으로 꼬박꼬박 월급을 받아가는 분들을 보면 한심하고 역겹다.
초소 이야기
1976년 5월 광주 보병학교에서 동해안경비사령부(동경사)로 배치받은 40여명의 동기생들은 약간 흥분 상태였다. 수료식을 몇일 앞두고 선배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동경사를 육군의 카츄사부대라 불렀다. 푸른 동해를 매일 바라보며 지역 어민들의 대우를 받으며 초소장 생활을 한다했다.
군용열차로 태백산맥을 횡단하며 처음 바라보는 동해안의 푸른 바다를 마주하고 속초의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 까지도 그 기대감에 부풀어있었다. 그러나 운없는 8명은 해안초소가 아닌 최전방 철책을 담당하는 88여단으로 배치명을 받았다. 간성의 여단본부에서 나와 동기(정용성, 외국어대) 한 명과 함께 철책선에서 투입된 1대대로 발령을 받았다. 군용 버스라 불리는 트럭을 타고 끝도없이 비포장도로를 따라 북으로 올라갔다.
우리 두명이 대대본부(현재 통일전망대)에 도착했을 때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대대장에게 신고를마치고 나오니 칠흑같은 밤이다. 동기생 정용성은 대대본부와 함께하는 중화기중대(현 통일전망대 아래 불상이 세워져있는 곳)에 배치되어 나와 마지막으러 헤어졌다.
내가 배치받은 2중대는 본부에서 산으로 3킬로정도 떨어진 까치봉이라했다. 내 안내는 여단 교육장교 대위였다. 체격이 우람한 그는 나를 데리고 해안으로 내려와 모래 풀밭을 앞서 걸어가며 발밑에 지뢰가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며 겁을주었다. 캄캄한 해안엔 북쪽과 아군의 서치라이트가 휘휘 바다를 휘젓고있었다. 대위는 나를 첫번째 초소(통일전망대 앞에보이는 첫번째초소)에 인계하고 돌아갔다.
내가 철책선 순찰로를 따라 가파른 산길을 올라 배치받은 초소(2중대2소대)에 도착하니 자정이 넘었다. 그래도 선임 소대장(송채헌, 전북대)은 후임이 온다고 전 소대원을 집합시켜 환영파티를 열어주었다. 결국 해안 초소장의 꿈은 산산이 깨지고 대한민국 최북동쪽 금강산을 마주보는 철책 담당 소대장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해 행운이 찾아왔다. 2번째 철책선 투입시 대대의 유일한 해안초소(통일 전망대 앞에있는 1번초소)를 맡았다. 이곳은 서해안에서 시작된 철책선이 한반도를 횡단하여 동해로 들어가는 끝지점에있는 대한민국 휴전선 최동북방의 1번초소다. 지금은 철책선이 앞으로 1키로정도 추진해서 송도(해안에연한 작은섬)앞으로 되었지만 당시엔 초소 바로 아래 개활지를 통과했다.
이 곳은 해안 일부와 산악을 담당하며 전술적으로 도 중요해 ,소대 편재화기가 아닌 로케트포와 중기관총 1정도 배치되었고 지하 벙커도 첫 부임지 보다 훨씬 넓어서 남는 방이 2개나 되었다.
당시 대대장(김용희중령)이 대대 썩터 중에서 제일 중요한 이곳을 우리 소대에 맏기는 것을 보고 우리 소대의 전투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나는 당시 노련한 초급 지휘관이 되어있었다. 소대원들을 완전 장악하고 4명의 분대장들도 전술 훈련이 숙달되고 우수했다. 부대 훈련에서도 자신감을 가지고있어 전군 어느 소대와 겨뤄도 이길 수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있었다.
이초소에서 근무하면서 일어났던 몇가지 사건과 일화를 소개한다.
- 1977/6 미군 치누크헬기 월경 사건(1)
한국군의 공사 지원을 나온 미군 헬기가 휴전선 지형을 오인하여 북으로 넘어갔고 북의 집중포화에 추락했다. 1명 사망,1명(미군 준위)은 판문점으로 송환되었다.
당해년도 전군의 가장 큰 사건이었다. 헬기 굉음을 듣고 대공초소의 중기관총을 발사했으나 연발 불량으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평상시 잘 나가던 총이 전날 밤 비가 조금 내려서 그런지 자동사격이 안되었다. 그래도 대대 최초로 헬기에 대공화기를 발사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있다. 얼마후 판문점을 통해 송환된 미군은 한국군의 경고사격을 받았다는 증언을 했다한다. 당시 카터대통령과 한국은 정치 관련 냉각기로 한미관계 안 좋았다.
평상시 전 대원을 중기관총(케리버50) 분해결합과 바다를 향해 실사격훈련을 시켰는데도 대공초소 근무를 서던 초병은 당황하여 넘어가는 헬기를 바라만보고 있었다. 벙커에서 뛰어나와 초병에게 고함을쳐서 사격 명령을 내렸던 기억이난다.
1977년 구선봉과 송도를 배경으로 소대원들 함께(앞줄 좌로부터 서정관/대전 김동신/당진 변은섭/아산 뒷줄 고영대/당진 김양곤/ㅇㅇ 신한기/부산)
철책선에서
풀벌레소리 그치고
밤이슬 헤치고 철책선에 서면
갈대밭 노루 울음소리
잡은 총에 힘이 간다
철조망에 걸린 달
어머님의 얼굴이고
소나무 밑 바람소리
아버님의 당부이어라
철모고지 허연 달빛
군번 잃은 병사들 춤을추고
구선봉 위 박힌 북극성
천년 두고 말이 없다
철교 밑 개울물에
졸음 떨쳐버리고
머리 들어 동해 바라보면
어느새 태양은
수평선을 넘었는가.
(1977년 8월 7일. 야간 근무를 마치고 들어와 철책 근무의 감상을 쓴 글이다)
초소 이야기(2)
송도 전복 작전
초소 앞 DMZ 안에 송도라는 작은 섬이 있다. 좌측은 백사장과 연하고 우측 바다 쪽은 갯바위가 많다. 섬 전체는 작은 관목과 조랏대로 덮여 있다.
7월이되어 날씨가 더워지면 대대장은 송도를 담당하는 초소장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린다.
송도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이다. 동해안에는 해산물이 풍부하나 손바닥 만한 큰 자연산 전복은 예나 지금이나 귀한 진품이었다.
나는 수영과 물질을 잘하는 대원7-8명을 선발해 송도 작전에 들어간다. 섬 앞 북쪽에 경계병 2명을 배치하고 준비해간 마대자루 1개를 나누어주고 해삼 전복을 채취한다.
나는 잠수에 자신이 없어 갯바위에 붙은 홍합을 주로 따 담았다. 작은 손바닥만한 홍합이 빽빽히 들러붙어있어 물속에 들어가 대검으로 하나 씩 떼어내 마대에 담는 일이 꽤 재미 있었다. 이곳은 일년 내내 민간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어서 해산물의 보고다. 30-40분 정도 작업하면 마대 자루가 꽉 채워진다. 간단하게 작업을 마치고 나면 갯 바위에 올라앉아 가지고 온 반합에 홍합탕을 끓이고 해삼과 전복으로 즉석 파티를 연다. 숨겨가지고 들어온 소주를 한 잔 씩 돌리고 막 잡은 해산물을 군용 된장에 찍어먹는 맛이 괜찮았다. 내 기억으론 당시 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반합에 아무것도 넣지않고 끓인 홍합탕이 제일 좋았다.
대원들이 회식을 하고 있는 동안 경계병 2 명이 제대로 서고 있는지 섬을 돌아 나가 점검해보았다. 덩치가 크고 운동도 잘 할 것 같아 경계병으로 데리고 들어온 신병이 얼마나 긴장했던지 얼굴이 흰색이되어 굳어져 있었다. 역시 ' 군대는 짬밥 그릇 수'라는 말을 이떄 실감했다.
작업을 마친 우리는 마대자루를 하나씩 메고 백사장을 걸어나온다. 철길 옆에 송도로 들어가는 작은 통문이 하나 있다. 대대장은 1호 지프차를 보내 우리들의 전과물을 인수하러 나온다. 우리 대원들은 통문을 통과 하기 전에 마대 몇 개를 풀섶에 던져 숨겨 놓고 나온다. 대대장이 가장 좋아하는 전복을 군용 20리터들이 식관 2개에 꽉 채워서 인계한다. 송도 작전이 있는 다음 날은 전 소대원에게 해산물 특식이 나오는 날 이었다.
초소 이야기(3)
-팔각정 건축
초소 벙커 위 취사장 앞에 10평 정도의 빈 터가 있다. 이곳에 서서 바라보면 뒤편에 대대본부(현재 통일전망대)와 전방의 구선봉(북 GP와 동굴진지가 들어있는 낙타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때 나의 군 생활도 원숙기에 접어들어 눈 감고 있어도 대원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훤히 눈에 들어왔다. 전 대원들의 훈련도 잘 되어있어 어느 소대와 겨뤄도 자신있다는 자부심과 만약 전쟁이 터지면 앞에 보이는 금강산으로 달려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다.
나는 그해 여름 이곳에 멋있는 정자를 하나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정자를 세우기위해선 큰 나무들이 필요하다. 철책 이남 지역은 수 십년간 필요한 나무를 모두 베어 큰 나무는 찾아보기 힘들다. 결국 위험을 감수하고 DMZ내로 들어가 베어가지고 나와야한다. 우리 초소 앞은 적의 전차 접근로라하여 표준형 지뢰지대(대전차 지뢰 1발에 대인지뢰 3발씩 매설)가 넓게 깔려있지만 사실은 미확인 지뢰지대가 더위험하다. 전방에서 사고의 반은 지뢰사고다.
전 대원들을 집합시키고 정자 건축을 위해 철책 안에 들어갈 지원자를 모집하였다. 지뢰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시키고 나서, 들어기 싫다든지 제대 말년으로 몸조심하겠다는 대원들은 제외시켰다.
많은 대원들이 자원을 했다. 맨 앞에 지뢰덧신(두꺼운 철판 밑창을 댄 군화)을 신은 대원이 지뢰탐지기를 앞세우고 풀섶을 한 발작 한 발작 씩 전진하면 뒤에 선 대원이 삽으로 앞 사람이 밟았던 발 자욱을 파내며 조심스럽게 전진해 나갔다. 폐선된 철둑길 아래를 따라 산 능선 언덕에 다다르니 아카시아 숲 속에 산딸기 밭이 펼쳐졌다. 모두 긴장감이 확 풀렸다. 철모를 벗어 딸기를 따 담았다. 먼저 번 초소에서 찾아 헤맸던 커다란 '피나무'도 하나 발견했고, 아름드리 오동나무도 있었다. 피나무 오동나무 그리고 팔각정을 세울 커다란 아카시아를 베어서 대원들이 등짐을 지고 들어왔던 발자욱을 밟으며 나왔다. 피나무와 오동나무는 냇물이 흘러 바다에들어가는 곳에 묻어두고 나왔다. 이 나무는 나중에 기념물 조각 원목으로 유용하게 사용했다.
팔각정을 세웠다. 피나무 껍질로 지붕을 해 덮고 식탁 아래 사방에 통나무를 잘라 반쪽내어 의자를 만들었다. 크기는 요즘 해변에서 사용하는 비치파라솔 보다 조금 큰 규모다. 몇일 후 북과 남쪽 대대본부로 부터 시계를 가리기위해 송도에서 대나무를 베어가지고와 발을 엮어서 울타리를 둘렀다. 이곳에 앉아 동해를 바라보며 식사를 했던 긴장 속의 낭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톱과 낫 만으로 소대원들이 만들어낸 팔각정 앞에서 중대장(윤우완/3사2기)과 소대원들과 함께
초소 이야기(4)
- 추석 송편 만들기(1977년)
군 생활을 하면서 철책선에서 명절을 맞이하는 기분은 항상 썰렁하다. 우선 남자들의 세계라 명절 기분을 좀처럼 느끼기 어렵다. 추석이나 설날은 특식이 나오지만 그 것 만으로 명절 분위기가 살아나지 않는다.
초소장이 조금만 준비하면 명절 분위기를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석을 맞아 송편을 초소 자체로 빚어보기로 했다. 소대에 급식용 쌀은 충분했다. 소대장 전령을 보았던 대원(문준근/ 장흥) 이 입대 전 떡집에 서 일했던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송편을 만들어보라는 지시를 했다. 쌀 20kg 정도를 커다란 군용 플라스틱 용기에 넣고 물을 부었다. 떡을 빚을려면 물에 불린 쌀을 가루로 만들어 내야한다.
통상 가정에서는 떡방아간에 가면 잘 빻아준다. 송편을 만드는 임무는 쌀 가루를 어떻게 만들어 낼것인지를 해결하는 문제였다.
소대에 가진 장비라곤 아무것 도 없다. 단지 풍족한 인력이 제일 큰 자산이다. 소대벙커 지붕 위 대공 초소에 2명이 24시간 근무를 서는데 실제로 큰 할일이 없었다. 근무자에게 쌀가루를 만드는 임무를주었다. 군용 양동이에 쌀을 조금씩 넣고 나무로 깍아 만든 소대장 아령을 절구공이로 삼아 빻았다.
밤새도록 쌀을 빻아 어렵게 가루를 만들어냈다. 가루를 골라내는 '체'가 필요했다. 지하 벙커 창문의 철망으로 된 모기장을 뜯어내 두겹 겹쳐서 쌀가루를 분리해냈다. 결국 대공 초소 근무자들이 몇 일 동안 노력하여 임무를 완수했다. 점검해보니 수 없이 빻았는데도 쌀가루는 밀가루 처럼 고울리가 없다.
이곳 초소는 깊은 산 속이 아니고 해안가에 있어 부대 밖과 접촉하기에 조금 수월했다. 선임하사가 외출편에 소를 넣을 콩과 설탕을 구입해 들여왔다. 몇몇 대원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솔잎을 따서 가지고왔다. 드디어 취사장에서 송편을 만들어서 시식해보라고 가지고 왔다. 거무스름한 통만두 처럼 보였다. 쌀 가루가 곱지않아 송편의 접착 부분이 벌어져 속이 흘러나온 것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는 해냈다. 맛은 좀 없지만 대원들은 우리가 직접 빚은 추석 송편으로 그 해 명절 분위기를 살려내고 즐겼다.
추석날 우리는 직접 빚은 송편과 약간의 과일을 가지고 초소에서 700m 정도 떨어진 철모고지 주간 초소 에서 제례를 올렸다. 전 대원의 무사고 전역과 고향의 부모님을 향한 효심의 의식이었다. 제례식에서 한 대원(신한기/부산) 이 담배에 불을 붙여 제단에 놓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초소이야기(5)
철모고지
소대 쎅타 좌측 끝부분에 '철모고지'라 부르는 작은 언덕이있다. 아래 쪽 개활지에서 바라보면 철모를 바닥에 내려놓은 모양이서 그렇게 불렸나보다.
정상에는 작은 벙커가있다. 이 벙커는 사용하지 않고 벙커위에 대공 초소를 만들어 주간 경계 초소로 사용한다.
야간 경계 원칙은 낮은 계곡에 위치하기에 철모고지 아래서 통상 근무를 섰다. 소대장도 야간 순찰은 철모고지를 한번 다녀오는 것이 일과다.
신병은 통상 부대 분위기에 익숙해질 때까지 근무자 편성을 하지 않는다. 몇 일이 지나면 소대장이 순찰나갈 때 동반하여 철책선의 분위기를 익히게한다.
소대에 신병(유병식/강능)이 한 명들어왔다. 작은 체구에 귀엽게 생겨서 큰 고생 안하고 자란 모습이다.부대에 적응이 좀 되었다고 생각되기에 순찰에 동반했다. 철모고지 에 도착하여 근무중인 분대장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철모고지의 전설을 들려주었다. 철책선이 만들어지기전 60년대 북한군이 야간 침투하여 철모고지 벙커에서 자고있던 아군을 화염방사기로 몰사시키고 돌아갔다. 당시 불탄 흔적으로 벽이 새까맣게 그을렸고 벙커는 폐쇠되었으나 ,이곳이 위치가 너무 좋아 여전히 주간초소로 사용하고있다.
초병들이 근무서다가 깜박하고 잠이들면 목이 답답한 느낌이들어 잠이 깨곤 한다. 당시 북한군에게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이 나타나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대략 이런 이야기를 실감나게 신병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나서 군장을 완전 해제 시키고 신병을 철모고지 계단을 혼자 올라가서 그을린 벽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하고 내려오라고 했다.
신병은 약간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더니 혼자서 캄캄한 철모고지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이 모습을 분대장과 함께 웃음을 참으며 바라보았던 기억이난다.
초소 이야기(6)
기념물을 세우다.
내가 그토록 바랬던 해안 초소장을 마치고 전역하게되면 다시는 이 초소에 들어와보기 어렵다.초소 근무 기념으로 무었인가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들었다.
우리 초소는 서양 영화에나오는 별장 같은 분위기다. 초소가 위치한 언덕을 찻길로 S커브를 돌면서 올라온다. 초소 언덕위에 멋진 기념물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들었다.
기념물은 결국 나무를 활용하는 수 밖에 없다. 철책 안에들어가 기념물을 세울 나무를 베어오기로했다.
다행이 우리초소는 DMZ안으로 들어가는 통문을 관리한다. 통문 키를 소대장이 관리하고있으니 본부에 들어간다고 보고하고 작전을 수행하면 되니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개 분대원을 인솔하여 통문을 열고 들어갔다. 깊숙히 들어가니 과연 나무들이 울창했다. 휴전 전에 마을이 있던 자리여서 꽤 모양이 좋은 나무도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뽕나무 하나를 발견했다. 아름드리 뽕나무 큰 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뻣은 잘생긴 나무다.뽕나무는 재질도 질기고 쉽게 썩지도 않아 세워 놓으면 훌륭한 기념물이 될것 같았다.
대원들이 나무를 베는 동안 내가 직접 전방에 나가 경계를 서주었다. 조금 지루해서 총을 나무에 걸쳐놓고 담배 한대를 피웠다. 나무를 찾아 너무 깊이 들어왔다는 생각이들었다. 사실 이곳은 수색대가 관할하는지역이다. 생각에 잠겨있다 뒤를 돌아 보니 대원들이 나무를 베어 목도를하고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내가 너무 앞으로 나와 경계를 서 대원들과 거리가 멀리 떨어졌다. 갑자기 약간의 공포감이 밀려왔다. 총을 다시 잡고 빠른 걸음으로 대원들을 따라붙었다.
뽕나무는 큰 가지만 남기고 잘라내어 소대입구에 장승처럼 세웠다. 나무 모양이 너무 멋져서 보기 좋았다. 나무에 걸 현판을 만들어 걸어야하는데 멋진 구호가 떠오르지 않아 일주일이 넘도록 고민했다. 기껏 떠오르는 것이 '초전박살 ' 일발 필중' 이런 것들 뿐이다.
고민끝에 '북진통일'로 정했다. 역시 가장 군인답고 155마일 휴전선 최동북단 1번 초소로써 상징성이 크다는 생각이들었다.
기념물(북진통일 기념탑)앞에서
초소 이야기(7)
속초 손님
사령부에 배치받고 선배들과의 만남에서 한 선배가 우리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줬다. "속초에서 눈빛이 안좋거나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은 친구들과 시비를 붙지마라. 장교라고 힘주다가 봉변을 당할 수 도있다" 이미 많이 공개되 알고있는 이야기다. 설악산 부근에 특수 임무(북파 공작)를 수행하는 부대가 있었다. 이따금 이곳 부대원들의 일탈 행동으로 보도되지 않는 사건들이 벌어지곤 하니 조심하라는 이야기다.
초소장으로 근무시 '속초 손님'이 온다는 전화를 받는다. 통문 키를 관리하는 초소장이 미리 나가 대기하고 있다가 통상적인 출입 절차를 생략하고 육중한 2중 철문을 열어준다. GP에 들어가는 부식차 편에 고도의 훈련을 받은 살기 번뜩이는 눈빛을 가진 요원이 금단의 선을 넘어간 것이다.
DMZ 통문 초병과 함께(김성술/전남)
당시 군복은 세탁 몇 번하면 탈색되어 허옇게변했다.
통일화라 명칭한 목이 긴 농구화같은 신발이 지급되었는데 땀 냄새에 찌들어 항상 냄새가 났다.
김성술 병장은 후임병들을 독하게 다뤄 제대후에도 그의 이름 만 들어도 가슴 쓸어내리는 병사들이있다.
초소이야기(8)
단체 수술
초소에는 2명의 상황 근무자가 있다. 주야간 경계근무 대신 소초내 상황실에서 교대로 무전기와 전화기를 담당하면서 외부와의 연락이나 지시를 수령하여 소초장에게 전달하고 소초장의 지시사항을 대원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주로 대학을 다니다 입대한 대원이 담당한다. 상황병은 소대장과의 접촉이 잦아 소대장의 심기 파악에도 노련하다.
하루는 상황병(고영대/ 당진)이 소대장실을 노크하며 들어와 멈칫거리며 이상한 제안을 했다. 소대에 포경인 대원들이 여러명 있는데 대대 위생병을 통해 수술을 할 수 있다고 전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당시 대대에 1명의 위생병이 배치되어 전방의 각 초소를 돌아다니며 간단한 치료를 담당하고 필요한 약도 지급해주곤했다.
GOP에 올라오기 전 예비대에서 내무생활을 하면서 대원들 중에 여러명이 포경인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일석점호 시간에 팬티를 내리고 성기 부분을 확인하거나 엉덩이 부위에 구타 흔적이 있는지 몇번 확인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위생병의 포경 수술에 선듯 승락을 안하자 상황병은 옆 3소대와 화기소대에서도 여러명이 시술을 했다며 나의 허락을 구했다. 제대하여 민간 병원에서 수술하려면 꽤 큰 비용이 들어간다고 말했다.상황병의 설득에 소대원들의 포경 수술 시술을 허락해줬다.
몇 일후 야간에 소대장실에 상황병이 노크를 하고 들어와 소대장 순찰용 랜턴을 빌려달라 했다. 무슨 일이냐 물었더니 지금 수술을 하고 있는데 어두어서 랜턴이 필요하다했다. 당시에는 전방 초소에 아직 전기가 들어오기 전이어서 호롱불을 켜고 생활하고 있었다. 랜턴을 빌려주고나서 어떻게 수술을하고있는지 궁금해 수술 중인 벙커내의 한 방을 들어갔다.
커다란 식탁 위에 소대원 한명이 바지를벗고 천정을 보며 누워있었다. 호롱불 2개를 심지를 한껏 올려 불을 밝히고 빌려간 랜턴으로 수술 부위를 비추고있었다.
식탁위에는 피묻은 가제와 솜들이 나뒹굴고 있다. 마치 시골에서 솜씨없는 일꾼이 닭잡는 광경같았다. 끔찍한 광경을 대하니 갑자기 메스꺼움이 올라와 뒤돌아 나왔다.
수술이 끝난후 물어보니 소대원 3명이 시술을 받았다.
문제는 몇 일 후에 나타났다. 수술받은 사람중 한 명(주문종/옥천)이 문제가 발생했다. 그 곳에 염증이 생겼다한다. 바지를 벗기고 확인해보니 꾀맨 자리가 벌겋게 부풀어 올라 도저히 눈뜨고 볼 수없는 끔찍한 모습이었다. 당장 어떻게 조치할 아무 방법이 없었다. 근무를 열외시키고 휴식을 취하게 하는게 전부였다. 그는 초소 앞 양지 바른 곳에 의자에 앉아 바지를 내리고 그것을 밖에 내놓고 일광욕을 하는 일이 전부였다.
걱정이 되었다. 상황병을 불러 자세히 물어보니 공짜로 시술한 줄 알았는데 위생병이 2만원 씩 받아 갔다고 말했다. 내가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것이 후회가 되기도 했지만 돌파리 위생병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다른 초소에 나가 활동중인 위생병을 어렵게 전화 연결 당장 정상적으로 치료를 하지 않으면 그냥 두지 않겠다고 고함을 치며 호통을쳤다.
위생병 도 겁이 났는지 다음날 즉시 달려와 응급 조치와 고단위 항생제를 주고가 일주일 정도 더 고생 후 기까스로 사태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초소이야기(9)
-조각병 최병도
군생활이 원숙기에 이르러 일상에 좀 여유가 생기거나, 전역을 앞둔 고참병들은 군 생활을 추억 할 기념품을 하나쯤 만들어가지고 나가길 원한다.
당시에 전방 군인들은 탄피를 쇠톱으로 잘라 목걸이나 반지를 만들었다. 산 고지에서 생활하는 군인들은 작은 목조각 기념물을 만들기도한다.
내가 까치봉으로 첫 부임하여 신참 소대장 때다. 선배인 1소대장 한중위를 따라 인접 대대 건봉산의 한중위 동기가 소대장을 하는 초소를 야간에 방문한 적이있다.
나는 그곳에서 피나무 바둑판과 선임하사가 만들어 가지고있는 멋진 조각품들을 보았다. 그 조각품들은 홍익대 미대를 다니다 입대한 사병이 만들었다고 자랑하는걸 들었다. 함께 간 한중위도 그 조각물들이 탐이났던지 선임하사와 내기 바둑을 두면서 한 개를 얻으려고 무진 애를썻으나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다.
당시 장교들이 가장 좋아하는 기념물은 피나무 바둑판이었다. 바둑판을 만들려면 피나무가 최소 직경이 40센티는 넘는 거목을 구해야만한다. 아무리 강원도의 첩첩산중 전방이지만 무수한 군인들이 수십년을 거쳐갔기에 아름드리 피나무가 산중에 남아있을리가 없다.
까치봉에 근무할 때 나도 한번은 노련한 고참 소대원을 몇명 데리고 피나무와 더덕밭을 찾아보겠다고 계곡 아래로 내려가 한나절 헤매고 다닌 기억이있다.
우리 해안 초소는 중대로 배치되어 오는 신병들의 첫 기착지다. 어느날 순찰을 돌고 소대 방카에 들어오니 신병 5명이 우리 중대 배치 명을 받고 가는길에 소대에 들어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모든 신병들이 그렇듯이 커다란 더블백을 두발 앞에 놓고 논산훈련소에서 지급한 헐렁한 모자를 눌러쓰고 허리를 곳게펴고 잔뜩 긴장한 상태로 앉아있다. 이때 고참 병 몇명이 근무를 마치고 들어오면서 앞으로지나가다 이런 저런 질문을 던졌다. 고향이어디냐? 군에들어오기 전 뭘 했었느냐? 긴장한 신병들은 고참 병사의 질문에 큰 소리로 답변을 한다. 멀리서 신병과 고참병의 대화 중 '조각'이란 단어가 귀에 확 들어왔다. 가까이 가서 조각을 했다는 신병을 찾아 직접 신상 파악을 했다. 입대 전 서울에서 대형 공방에서 조각사로 근무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신병을 옆으로 빼내 몇가지 주의와 당부를했다. 중대에 전입신고하러 올라가면 신상파악을 다시 할텐데 절대로 조각하다 입대했다는 사실을 말해선 안된다. 그래도 혹시나 신병이라 순진해 발설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만약 "조각"이나 "ㅈ" 자만 뻥긋해도 앞으로 군생활이 힘들어질 수 도있다고 약간의 겁도 주었다.그 신병은 몸이 좀 뚱뚱해서 일반적으로 소대장들이 선호하는 운동을 잘하거나 행군이나 힘든 작업을 잘하는체형은 아니었다.
우리 소대도 신병을 충원 받아야했다. 내가 직접 중대본부에 올라가 조금은 좀 어눌해보이는 그 병사를 우리소대에서 받겠다고 찍어서 데리고왔다.
그 병사 이름이'최병도'다. 소대장 생활 1년만에 드디어 보물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병이 소대 생활이 익숙해질 때 까지 몇개월을 다른 신병들과 동일하게 생활하게했다. 그리고 그가 주변 환경과 초소 생활에 익숙해졌다고 생각이되어 특별한 임무를 부여했다. 벙커의 빈방을 하나 내주고 조각을 전담케하였다. 우리 초소 벙커는 좀커서 빈 방이 2개나 있었다. 마침 송도 앞 DMZ에 들어가 작업하던 중에 우연히 찾아낸 직경 25센치 되는 피나무와 커다란 오동나무를 베어가지고 나온 조각 재료가 있었다. 소대의 분대장들과 고참병들에게 최병도가 근무자 편성에서 빠지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해주고 입단속도 시켰다. 훈련과 근무 열외는 소대장 권한으로 가능한데 혹시 그의 특기 활동이 소대 밖으로 새어나가 빼았기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소대 조각병 최병도는 특별히 마련된 지하 벙커 작업실에서 작품 활동에만 열중했다. 휴가자 편에 서울에서 전문가용 조각칼 세트를 구입해와 지급해주었다. 맨처음 만들기 시작한 것은 군함이다. 주로 해군들이 많이 만든다는 구축함 모형이다.피나무를 잘라 몸통을 만들고 안테나와 함포를 만들어 붙인다. 쌀알 만한 대포알도 깍고 다듬고 사포로 문질러 본드로 붙이고나니 제법 멋진 모형 군함이 탄생하였다. 제대자들에게도 작은 소품을 만들어 기념품으로 주니 최병도의 근무 열외에 모두들 불만이없었다.
소대원들에게 철저한 입단속을 했지만 6개월정도 지나 결국 중대장이 알게되었다. 중대장(윤우완 대위)은 밖에서 좀더 좋은 재료들을 구해와 나에게 작업을 요구했다. 중대장의 오동나무 바둑판과 주목으로 바둑알통을 만들었다.재료가 좋다보니 그간 내가 만든 군함과 용모형들은 시시한 작품으로 보였다. 소대의 조각병 최병도는 결국 대대까지 소문이나서 대대장(김용희 중령)에게 빼았기고 말았다.
그가 만든 작품 군함과 용은 휴가 때 가지고 나와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사다닐 때 마다 보물처럼 들고 다녔다. 그후 수년 지나 백화점에 진열된 더 좋은 작품들을보니 좀 유치해보이고 집안의 거추장스런 물건이되어서 모두 버렸다. 마지막으로 최병도가 서명을 한 거북모양의 담배갑 세트가 아버님댁 현관에 놓여 있었다. 수년 전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집을 처분하면서 방문해보니 아쉽게도 쓰레기 치우는 사람들이 모두 내다버려 찾을 수 없었다. 소대원 최병도가 만들고 특별히 서명을 해 준 그 기념물 잃어버리고나니 무척 아쉽다.
초소 이야기(10)
-괴목 사건
대대장이 나에게 특별한 작업을 명했다. 대대장이 계곡에서 채취해 구해온 괴목을 소대 조각병인 최병도에게 잘 손질하고 다듬어 멋진 작품으로 만들라는 지시다. 대대장(김용희 중령)은 특전사에 근무하다 보병부대에온 단단한 체격에 강한 카리스마 넘치고 예하 중대장들과 소대장들 이 조금 어렵게 바라보는 분이었다. 당시 우리 소대는 대대의 전투력평가에서 우수했고, 대대장이 나에게 개인적으로 몇번 호감을 보인적이 있어 좋은 상하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대장이 보내온 괴목은 높이가 50센치 폭이 40센치 정도되는 부채살 처럼 뻗은 나무 뿌리다. 단단한 뿌리가 땅속 자갈 밭을 헤집고 땅속으로 뻗어나가다 단단한 돌에 걸려 우측에 주먹 만한 흰돌과 좌측에 검은돌을 감싸 안고있다. 나무 뿌리를 채취하면서 생긴 흠집과 칼 자욱들을 표나지않게 제거하고 사포로 매끈하게 다듬는 작업이다. 내가 봐도 탐심이 생기는 괴이하고 멋지게 생긴 괴목이다.
조각병 최병도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한동안 대대장 지시의 작업만을 수행하였다. 대대장은 몇번이나 나에게 전화를 걸어 작업의 추진 현황을 점검했다. 나도 벙커 작업실에 자주 들어가 멋진 작품이 만들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감탄사를 발하곤했다. 소대원들도 그 물건이 대대장 것임을 잘알고 함부로 다루지 못했다.
대대장이 작업 지시 일주일 정도 되서 오후에 갑자기 수색 대대장을 동반하고 우리 소대를 방문했다. 소대 벙커위에서 동행한 대대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나를 불러 작업 지시한 물건을 가지고 나오라했다. 아마 멋진 작품을 친구에게자랑하며 보여줄려한다는 생각이들었다.
내가 벙커 작업실에 들어가 들고 나오려 괴목을 찾으니 보이지 않았다. 뭔가 좀 이상했다. 분명히 있어야할 자리에 괴목이없었다. 소대에 남아있는 대원들을 불러 물어봐도 모른다했다.귀신이 곡할노릇이다. 최전방 GOP 벙커 안에 보관되있던 물건이 증발해버린 것이다.소대원들 모두 대대장 물건임을 잘알고 있던 귀중품이라 누구를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우선 밖으로 나가 대대장에게 물건이 안보인다고 말했다. 대대장도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시 벙커에 들어가 소대원들을 모아 상황을 점검했다. 오전에 부대 전화 공사가있었다. 당시 철책선 부대에 전기가 안들어와 밤이면 호롱불을 키고 생활했다. 그제서야 우리 부대에도 전기 공급 시설 공사가있었고 이공사는 민간인 업자가 진행했다.공사를 위해들어온 공사업자가 벙커에 잠깐 들린적이있다고 주간 보초를섰던 소대원이 말했다.
확실한 단서를 찾았다. 각 초소에 연락해 공사차량을 수배하니 부대 초소를 벋어난지 꽤 오랜시간이 지났다했다. 알아보니 공사업자가 대진 읍내에 머문다고했다.대대장에게 차량을 빌려달라고해 그들을 찾아나섰다.도둑놈을 찾으면 들고나간 총으로 쏘진 못해도 개머리판으로 머리통을 갈겨줘야겠다고 흥분해있었다. 대진 읍내에 나가 공사업자가 머무는 집을 찾아냈다. 집에는 외출하고 아무도 없었다. 업자가 머문다는 방을 찾아 작은 방문 틈으로 들여다 보니 책상위에 신문지로 커다랗게 포장한 괴목이 놓여있었다. 문을 뜯고 들어가 들고나왔다.
청춘 시절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그 사연 많은 괴목 지금 어느집 응접실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초소 이야기(11)
빳다
1970년대 군 생활을한 남성이라면 군대 이야기 중에 공통으로 나오는 단어가'빳다'라는 용어다. 영어 배트(Bat/ 몽둥이)의 한국식 표현이다.
빳다는 군에서 상급자가 하급자를 몽둥이로 엉덩이를 때려 체벌을 가하는 행위다. 이런 가혹행위는 일본군의 악습으로 일제시 일본군에서 복무했던 군인들을 통해 초기 한국군으로 전수되었는 설이 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으로부터 많은 선진 군사 문화가 전수되었으나, 내가 군생활을 경험한 78년까지는 실재하는 악습이었다.
군 수뇌부에서도 이런 비민주적 악습을 제거하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쉽게 근절되지않고 오랬동안 지속되었다.
당시에도 체벌을 금하는 '얼차려'라 부르는 군기 위반자에 대한 새로운 신형 통제 방법이 내려와 시행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소대장을 할 때에도 군기를 잡는다는 명목하에 이런 빳다 행위가 있었다. 제일 많이 일어나는 유형은 고참 선임병이 하급자에게 가하는 체벌이다. 당시엔 사회 편견과 지역감정이 군에까지 스며들어 있어 경상도 출신과 전라도 출신 병사간의 알력이 심했다. 전라도 출신 왕고참 병장 성격이 좀 거칠면 그가 전역할 때까지 경상도 출신의 상병과 일병들이 기를 펴지 못했다, 그가 제대하여 경상도 출신 병장이 패권을 잡으면 반대 현상이 일어났다. 충청 경기 서울 강원 지역의 병사들은 지역색이 적어 모두 호감을 가지는 편이었다.
당시는 3년 복무 기간으로 입대 순 서열이 딱 정해져있다. 이 틀에 한번 들어가면 깨기가 어려웠다. 신참병들이 고생했던 일들이 본인이 고참병이 되면 본인들이 당한 악습이 당연히 누려야할 특권으로 의식하며 후임병들에게 이어지는 악순환되는 구조였다.
군대는 계급사회다. 군법과 규율에의해 통제를 받는다. 이 법에 따른 계급 질서가 무너지면 명령 지휘계통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전시에 강군이 아니라 오합지졸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소대에도 소대장 아래 선임하사와 분대장 4명이 있다. 당시 하사관학교에서 특별 교육을받고 부대배치를 받은 유능한 분대장들이었지만 소대 고참병들과의 알력이 있기도 했다. 고참병들이 만들어 가지고있는 기득권과 서열 의식이 군의 계급 서열과 일치하지 못하고 마찰하는 현상이 있었다.
소대장이 임무를 잘 수행하려면 이런 구조와 대원간의 상호 관계를 잘 파악하고 기강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특히 GOP 소대에서는 기강이나 질서의 해이는 곧 인사 사고로 이어진다. 60년대 155마일 휴전선에 철책이 들어서고 난 이후 북한군과 교전에의한 사고는 거의 없어졌다. 모든 사고는 군 내부의 기강해이나 조직내의 계급 갈등에서 발생하는 사고다.
내가 소대장을 할 때에도 우리 부대에 몇 건의 사고가 있었다. 당시는 군에서 일어나는 사고는 요즘 처럼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지뢰사고 폭발물사고 가혹행위 사고로 안타까운 죽음과 부상당한 병사들을 직접 목격했다.
나도 초소장 시절 빳다에 관한 몇 번의 일화가 있다. 일반적으로 장교들은 화가나더라도 빳다를 통해 체벌을 가하거나 기강을 유지하지는 않는다.
장거리 이동시 행군을 한다. 통상 도로 양편으로 줄을지어 걸어간다. 행군중에 일정 대오를 갖추고 병사간 거리를 유지하며 군기를 유지하도록 지시한다. 행군 대열 속으로 차량이나 민간인들이 지나갈 때가 많다.
한번은 산에서 내려와 마을 앞을 지나가는데 마을 처녀 한명이 우리 행군 대열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행군 대열 앞에서 인솔해가면서 뒤를 바라보니 대열 속으로 들어온 마을 처녀를 희롱하는 모습이 눈에 띠었다. 그처녀는 부끄러워 어쩔줄몰라하다가 군인들을 피해 큰길을 벗어나 힘든 밭둑길로 들어가고 있었다. 화가나서 희롱했을 병사 몇명을 점검해보니 술기운이 좀 있어 보였다. 수통을 확인해보니 술이 나왔다. 참을수없는 분노가 터져나왔다. 행군을 중단시키고 전 대원을 업드려뻣쳐를 시켰다. 길 옆의 커다란 나무가지를 꺽어서 빳다를 쳤다. 너무 화가나서 맨앞에 대원부터 3대씩 때리며 내려오다 내가 힘이빠져 뒷줄은 1대씩 밖에 때리지 못하고 끝냈다.
별로 큰 사건도 아닌데 소대장이 너무 심하게 대한다는 표정을 대원들에게서 읽었다. 사실 빳다는 심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 학교시절 삼국지에서 읽은 군이 주민에게 피해를 주면 절대 강군을 만들 수 없다는 잠재의식이 작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해안초소 근무시 일이다. 화장실은 벙커에서 20미터쯤 떨어진 옥외 건물이다. 자정을 넘어 1시쯤에 화장실에 가는 중이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툭하며 이상한 물체가 발 앞에 떨어졌다.기이한 생각에 집어들어 확인하니 꽤 커다란 몽둥이였다. 몽둥이가 날아온 방향으로 올라가보니 취사장 건물 앞에 대원들 몇명이 부동자세를 취하고 서있었다. 고참병(주문종/옥천)이 후임병 몇명을 불러내 막 일을 끝내고 집어 던진 것이 하필이면 화장실 가는 내 발 앞에 떨어진 것이다.
얼마전 이 이야기를 전우회 송년 모임에 했더니 대기업 임원을하고 얼마 전에 퇴직한 김승환사장이 "소대장님 그 때 제가 주문종 선배한테 그 빳다 맞았습니다" 라고 말해 함께 웃었다.
한 세대가 지나 우리 아들 둘이 군생활을 하는 동안 확인해보니 이런 악습이 말끔이 사라졌으니 다행이다
초소 이야기(12)
카타콤 예배
GOP 부대에도 일요일(휴일)은 있다. 군에서 일요일은 훈련이나 교육 또는 작업 지시가 없다. 일과 시간표에는 주로 목욕 이발 세탁 정비 란 용어가 등장한다.
그러나 철책선 경계 부대는 좀 다르다. 경계근무는 24시간 빈틈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낮 일과 시간에도 대원들이 한 번에 한 자리에 집합하기 어렵다. 주 임무가 철책선 경계인 만큼 모든 대원들이 경계 근무에 투입된다. 야간 근무는 전반야조(해질무렵부터 자정까지)와 후반야조(자정에서 해뜰때까지)로 나눠 근무에 투입되고 후반야조 투입 인원은 오전에 취침에 들어간다. 따라서 일요일에 전 대원이 한번에 목욕 세탁 정비를 수행할 시간 여유가 없다. 대원이 한 자리에 모이는 때는 식사 시간 뿐이다.
처음 까치봉 7-5 P에 첫 부임하여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일요일 오전에 소대 상황병을 보고 있던 고영대 상병이(충남/ 당진) 소대장실 문을 노크했다. 상황병은 소대장과 근접 거리에서 가까이 지내기에 소대의 문제점도 말해주고 대원들의 건의사항도 올라오는 통로다. 고영대의 건의는 일요일에 소대서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내용이였다. 당시 대원들의 신상 파악을 통해 알게된 종교 상황은 기독교로 신고한 대원이 그리 많지 않았다. 다른 종교나 무교로 표시한 대원도 많이 있었다. 약간의 망설임은 있었으나 허락해주었다.그 시절 젊은이들의 종교인식이 특정 종교에 절대적이거나 다른 종교에 배타적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판단 했다.
일요일 전 대원이 아침 식사를 마친뒤 벙커에 모여 일요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 나도 입대 전 초등학교 시절 교회에 몇 번 가본 적은 있으나 교회 다닌다고 말하긴 어려운 상태였다.
예배 인도는 고영대가 맡아했다. 소대에는 외부에서 제공한 손바닥 만한 작은 성경책들이 많이 있었다. 예배의식 이라야 간단하다. 주기도문 외우고 찬송가 한 곡 부르고 성경 한 구절 읽어주고 고영대가 대표기도하는 순이다. 전 대원을 모두 참석토록 강요하진 않았다. 그러나 초소장인 내가 항상 예배에 참석하니 많은 대원들이 함께 했다. 당시 주로 불렀던 찬송가는 '태산을 넘어 험곡에가도'였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않네"
찬송가도 언제나 고영대가 선곡했다. 참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책선 경계부대는 항상 긴장의 연속이다. 근무자는 실탄이 장전된 소총을 항상 소지한다. 야간 근무자는 수류탄까지 휴대하고 근무에 나가기 때문에 위험성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대원들도 이런 미지의 위험으로 부터 긴장감을 덜어내기위해 예배에 참여하고 마음의 위안을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칠흑같은 밤 가파른 계곡의 철책선 순찰로를 밧줄을 잡고 오르내릴 때 면 우리가 부른 찬송가 구절이 생각나는 것은 아마 모든 대원들이 같은 마음 이었으리라.
벙커 내부는 대원들이 생활하기엔 무척 좁은 공간이다. 내무 생활을 위한 공간이 아니고 잠을자는 공간이다. 요즘 도시의 30평도 안되는 아파트 공간에 30명이 넘는 대원들이 잠을 잔다. 좁은 공간에 나무로 2층 침상을 만들어 놓았다.당시에도 철책선에 지하벙커로 된 초소와 별개로 지상 건축물의 넓은 초소 막사도 있었다. 우리 소대는 운없이도 6개월 마다 돌아오는 철책 근무 투입시 모두 지하 벙커 초소에서 생활했다. 당시엔 전기불도 없어 호롱불을 밝히며 생활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후임병들은 호롱불의 유리로된 호야를 깨끗이 딱는게 큰 일과였다.
지하 벙커의 컴컴한 침상 아래 위 칸을 꽉 채워 쪼그리고 앉은 대원들이 일요예배를 드린다. 어둠을 밝히는 호롱불에 성경책 작은 글씨를 고개숙여 들여다 보는 대원들, 벙커내에 '태산을 넘어 험곡에가도' 가 우렁차게 울려퍼진다.
나는 이 광경을 기억해볼 때 마다 로마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 지하 묘지(Catacomb/ 카타콤)에 모여 예배를 보았던 기독교인들이 떠오른다.
일요 예배를 제안했던 고영대 상병 그가 고맙다. 우리 대원 모두가 한 명의 부상자나 낙오자 없이 무사히 군무를 마칠 수 있었던 은혜를 카타콤의 일요예배로 돌리고싶다.
초소 이야기(13)
치누크 헬기 월경 사건 (2)
미군 치누크 헬기를 향한 우리 대공초소의 케리버50 중기관총의 사격 몇 발 이 끝나자 220 GP에서도 30-40발의 요란한 총성이 들렸다.
GP의 중기관총 사격 역시 헬기 조준 사격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헬기가 구선봉 넘어로 모습을 감추고 3-4분이 지났을 때 북에서 요란한 총성과 포성이 들려왔다. 북한군의 총성이었다. 그들이 어디를 향해 총을 쏘는지 우리 초소에서는보이지 않아 알 수가 없고 단지 요란한 총성만 들렸다.
북한군의 총성이 그치자 대대와 중대로부터 상황을 보고하라는 전화가 계속 걸려왔다. 전방 GOP 부대의 모든 화기는 즉각 사격태세를 유지해야만 한다. 중기관총이 자동발사가 안되 제대로 사격을 못한 책임에 대한 불안감이 커져왔다.
초소장으로서 이런 돌발 상황을 대비해 평상시 전 대원들을 케리버50 분해결합 교육을 시켰었다. 바다를 향해 연습 사격도 여러 번 했었다. 이 모두 상급부대서 강제하지 않은 초소의 자발적인 훈련이었다. 전임 초소장은 인수인계하면서 대공초소에 고정 근무자를 세우지 않았다고 말했다. 근무자가 늘어나면 소대의 주간 가용 인원이 줄기때문이다. 그러나 군인은 결과를 가지고 말해야한다. 전날 밤에 비가내려서 총이 제대로 작동을 못했다. 낡은 총이라 문제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변명으로 들릴 뿐이다. 단지 넘어가는 헬기를 표적으로 우리 초소에서 최초로 사격을 가했다는 사실에 좀 위안이되었다. 대대 본부에는 승전포라는 중기관총 4개 총열을 붙인 고성능 대공무기가 있었다. 그러나 헬기가 월경 할 때까지 단 한발도 사격을 하지못했다.
대공 초소에서 텅빈 하늘을 보며 정신차려보니 또 다른 실수가 보였다. 헬기를 대공포로 격추시켜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소총 사격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넘어가는 헬기는 바다쪽으로 멀리 떨어져 비행했지만 워낙 큰 몸통으로 M16 소총의 유효사거리 안에 있었다.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하며 초소장의 책임 부문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케리바50 을 5발 밖에 사격을 못하고, 소총 사격을 못한 대책을 준비하기로했다
대공초소의 초병 소총을 뺏어들고 벙커안으로 들어갔다. 벙커의 총안구에서 밖으로 보이는 DMZ를 향해 2탄창을 연달아 사격했다. 탄피 30발을 만들었다.
케리버 50 탄통에서 탄알을 10발쯤 분리했다. 탄알에서 탄두를 뽑아내 탄피를 만들었다.탄두를 뽑아낸 탄피와 실제 사격 탄피를 비교해보니 차이가 있었다. 우선 공이치기가 작동않아 뇌관을 때린 자욱이 없었다. 다시 총열에 넣고 방아쇠를 당기니 같아졌다. 다시 비교해보니 탄알의 화약이 터지지 않아서 탄피 속에 그으름이 없었다. 쏟아낸 화약을 다시 탄피안에 넣고 불을 붙여 연소한 그을음을 만들었다. 또 다시 정밀 비교하니 칼퀴 자욱이 없어 톱을 가져와 칼퀴 자욱을 만들었다.
치사한 짓거리였다. 초소장으로서 최선의 노력을 했지만 운이 없는 나 자신을 위해 이렇게라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몇일 후 상급 부대에서 내려온 지시 사항은 정 반대였다. 한미합동조사단이 나와서 물어 오면 미군 헬기에 직접 조준사격을 하지 않았다고 답변하라했다. 탄통의 탄알은 6발에 1발씩 예광탄을 장탄해 놓으라 지시가 내려왔다. 당시 한미 관계는 최악의 상태였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주한 미군 철수를 주장했고 박대통령은 강공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한국군의 내심 은 미군 철수를 막아야할 입장이었다. 따라서 미군을 향해 직접 사격을 가하지 않았다는데 촛점을 맞추고 있었다.
당시 우리 초소의 낡은 중기관총 케리버50이 정상 작동되어 운 좋게 미군 헬기를 격추했었다면, 나와 우리초소는 영웅이 되었을지 몰라도 국가 안보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리란 생각이든다.
초소 이야기(14)
사라진 기회
미군 헬기 월경 사건 몇 달이 지나서였다. 여름 태풍이 한 차례 지나가는 오후였다. 대공 초소의 초병한테 보고가왔다. 배 한 척이 풍랑을 헤치고 북진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밖으로 나와 초소 후편 바다를 바라보았다. 멀리서 높은 파도에 뒤뚱거리며 다가오는 것 같기도하고 배가 표류하고 있는 듯 보였다. 어로 한계선은 우리초소 후방에 위치한 대대본부 에서도 2Km나 더 후방의 3분초 앞 바다에 그어져있다. 만약 남쪽에서 북진 항해했다면 3Km 정도를 넘어선 것이다.
지난 봄 미군 헬기 월경시 구겨진 자존심을 살릴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소 화력을 총 집결 시켰다. 새로 들어온 화기분대장도 믿을 만했고 기관총 사수들도 모두들 훈련이 잘 되있었다. 57미리 무반동총을 들고나와 거치시켰다. 무반동총은 우리 초소에 만 배치된 중화기다. 초소가 적 대전차 접근로이기에 소대 편제화기가 아닌 무반동총 1정과 중기관총 1정이 배치된 것이다. 이번 기회에 무반동총을 실 사격해볼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어로 한계선을 넘어와 월경을 시도하는 배는 너무 멀리 떨어져있다. 우리 초소 앞까지 다가와야 사격 명령을 내릴텐데 좀처럼 올라오지 못하고 높은 파도에 뒤뚱거리며 제자리를 맴돌 뿐이었다. 대원들 모두 배를 쳐다보고있을 때였다. 배 옆구리에서 섬광이 번쩍했다. 그리고 포성이 들렸다. 3분초에 배치된 탱크포가 작열한 것이다. 수분 후에 해경의 예인선이 다가와 끌고갔다.
이렇게 모처럼 다가왔던 또 한번의 기회가 사라져버렸다.
불운이 행운이되고, 행운이 불운이 되기도 한다.
초소 이야기(15)
땅굴 탐지병
GOP근무 당시 상급 부대의155마일 휴전선 방어의 문제점은 적의 땅굴 침투에 대응책을 어떻게 마련하는가 이었다.
당시에도 제3 땅굴 까지 발견되어 전방 부대에 땅굴 탐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적의 땅굴에 의한 기습 남침은 최전방에 배치되어 방어 1선을 구축한 GOP부대를 한번에 무력화 시킬 수있는 가장 두려운 전술 중의 하나 임이 분명하다.
병사 모두가 앞의 적을 향하여 총구를 겨누고 있는데 야간에 적 정규부대가 후방에서 나타나 공격을 가해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상상이된다.
8-21P 우리 초소에도 땅굴 탐지 장비가 설치되었고 탐지병이 선정되어 24시간 감시 장비를 운영했다.
당시 PK3 라는 탐지 장비가 있었다.
간단히 설명하면 지하 청음기다. 새로 개발된 국산 장비라고 들었다.
적의 땅굴 굴착 예상 지점에 청음봉을 설치해놓고 유선으로 초소에 연결되어 있다. 탐지병이 레시버를 끼고 지하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이상음이 들리면 녹음해서 상급 부대에 보고한다.
우리 초소는 초소에서 200미터 쯤 떨어진 언덕 후사면에 탐침이 3곳 뭍여 있었다. 높이 1미터 지름 6미터 정도의 반원형 흙 더미속에 청음기가 설치되어있다.
당시 상황병 1명이 레시버에 들려오는 소리를 잡아내는데 내가 레시버를 쓰고 들어보면 기계 웅웅거리는 기계 잡음 소리와 이따금 쿵쿵 거리는 소리도 들리곤했다. 대원들을 시켜 청음기가 꽃인 곳에서 땅을 구르게 하면 사람 음성과 함께 뛰는 소리도 감지되곤 하였다. 가끔은 지하의 발파 소리같은 큰 소리도 잡혀 긴장감이 들기도 했는데 정확히 지하의 소리인지 지상의 소리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소대의 상황병이었던 손봉익 상병이 탐지병으로 상급 부대로 부터 명을 받았다. 24시간 청음병으로 레시버를 끼고 근무한다.
얼마후 GOP근무부대 교체 계획에 따라 소대 전원이 후방 예비대로 짐을 싸서 철수하게되었다. 상급 부대에서 지시가 내려왔다. 땅굴 탐지병은 철수에서 제외되고 현지부대에 전문 탐지병으로 잔류하라는 인사명이었다.
대원들 모두 군장을 꾸려 메고 초소를 인계하고 떠나려 모였는데 손봉익 상병이 나와 정들었던 대원들과 악수를 나누게되었다.
손봉익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고락을 함께한 전우들과 헤어져 낯선 집단 솎에 혼자 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군대 다녀온 이들은 설명 안해도 안다.
초소이야기(16)
벙커 초소
우리 초소는 해발 800미터 고지에 위치하며 위쪽으론 1,000미터가 넘는 '까치봉'과 '건봉산'이 위치하고 아래쪽에는 능선이 동해바다를 향해 달리다 '고황봉'을 이루고 있다. 우리와 마주본 북쪽에는 금강산 일만이천 봉우리가 파노라마를 이루며 한눈에 들어온다. 따지고보면 우리 초소도 금강산 외곽 봉우리중의 하나인 셈이다.
우리측 7,8부 능선을 따라 철책선이 만리장성 처럼 동해를 향해 달려 내려가고 철책선 안 비무장지대에 있는 GP가 닭장처럼 작게 내려다 보인다. 우리쪽 능선과 북쪽 연봉 사이에 '남강'이 흐른다. 비가 내린후 산안개가 피어모르면 작은 연봉들은 모두 안개 구름에 잠기고 금강산의 연봉들만 구름위에 떠있다. 초소에서 이광경을 바라보면 신선이 산다는 선계에 들어선 양 착각할 정도의 황홀경에 빠질 때도 있다.
초소는 지하벙커로 25평 정도되는 공간에 2개의 작은 방과 2층 침상으로 만들어진 내무반 구조로 되어있다. 30여명의 인원이 생활하기엔 비좁고 햇볕이 들지 않아 쾨쾨한 냄새가 났다.
소대의 경계근무 관할 지역은 대략 1.5Km 정도다. 평지의 1Km는 가까운 거리지만 험준한 산악지역의 경우라면 평지의 배정도 길게 보면 된다. 험한 산골짝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뻗어나간 철책선은 오르막 계단이 300~400개가 넘고 너무 가팔라라 순찰로를 따라 설치한 밧줄을 잡고 올라야하는 곳이 태반이 넘는다. 소대의 철책선을 한바퀴 다 둘러볼라치면 서울의 북한산이나 관악산 정상까지는 못가도 중간정도 를 등반하는 셈이다.
철책선 경계근무는 소대원을 전반야조와 후반야조로 양분하여 대원2명이 조를 이루어 주요 포스트에 근무투입하게된다. 전반야조는 해질무렵 투입하여 자정에 교대하고 후반야조는 아침해가 뜨면 철수 한다.
철책선 소대의 하루 일과는 야간 경게근무와 주간 작업이다. 후반야조는오전에 취침을하는데 남은 인원을 이끌고 작업을한다. 소대에는 무슨 크고 작은 일거리가 계속 발생한다. 순찰로 보수작업 화목작업 철책선 가로목 보강작업 통신선 매설작업 크레아 박스 교체작업 사계청소 작업등으로 주로 선임하사가 지휘감독하고 소대장이 함께 할때도 있다.
철책부대에 와서 보고 배운 점은 이 모든 작업을 톱과 낫 야전 곡괭이만으로 해낸다는 것이다. 부임후 첫 작업이 개인호 크레모아 박스를 전부 교체하는 작업이었다. 나무 박스를 만들기 위해 산 아래 계곡에 내려가 피나무를 베어 등짐으로 메고 올라와야 한다. 나무 껍질을 벗기고 50센티 정도 톱으로 자르고 옆으로 세워 낫으로 5센티 정도 판을 조각내고 날을 세운 곡괭이로 잘 다듬으면 나무 판자가 만들어진다. 이것을 규격에 맞게 잘라서 철조망의 철삿줄을 2,3센티씩 잘라서 못으로 사용하면 훌륭한 박스가 만들어진다. "군대에서 삽과 곡괭이만 있으면 못하는 일이 없다"는 말을 처음으로 체험한 작업이었다.
초소이야기(17)
최고의 절경 화장실
화장실은 소대원이 생활하는 지하 벙커에서 20미터 정도 떨어진 능선 후 사면에 위치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재래식 화장실이다. 모두 4칸으로 1칸은 소대장용이다. 땅 바닥에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파고 나무로 발판을 얹었다. 벽은 나무를 엮어 울타리를 치고 지붕은 피나무 껍질을 얹었다. 그나마 소대장 전용은 나무를 촘촘하게 엮어 밖에서 잘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성의를 보였다. 바람이 술술 들어오고 비가 오면 지붕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건 매한가지였다.
7,8월 여름에 화장실에 들어가 앉으면 눈앞에 펼쳐지는 파노라마 경관이 장관이다. 바다를 향해 힘차게 내달리는 푸른 능선, 푸른 동해 바다는 멀리 공제선 넘어 좌측 원산 앞바다에서 우측 포항 앞바다까지 둥근 반원을 그리며 펼쳐진다.
여름밤에 화장실에 앉아 문을 열어 제치고 있으면 더욱 화려한 바다풍경이 펼쳐진다. 오징어잡이 배 수십 척이 떠서 집어등을 밝히고 어로작업을 하는 광경이다. 오징어잡이 배들이 많이 뜰 때면 반대편 산 넘어 철책선 에서도 밤하늘을 훤하게 밝혔다.
젊은 시절 산 속에서 험난했던 군 생활은 하루에 한번 화장실에 앉아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는 기쁨으로 큰 보상을 받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초소 이야기(18)
안전 관리
GOP부대의 임무는 완벽한 경계 근무다. 완벽한 경계근무 못지않게 초소장이 신경써야 할일이 안전사고가 없도록 하는 일이다. 155마일 휴전선에 철책선이 처진 이후에 북한군과의 교전보다는 안전 사고 총기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은 병사가 대부분이다.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서는 소대의 기강을 확실하게 잡아야한다. 특히 소대장은 대원 상호간의 인간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한다. 당시엔 고참병의 하급자 폭행이 다반사였다. 하사관인 분대장과 고참병간의 갈등도 심하고 전라도와 경상도 병사들간의 지역 갈등도 보이지 않는 위험 요인이었다.
항상 실탄이 장전된 소총과 야간에는 수류탄까지 휴대하기에 모두가 잠재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풀숲에 깔려있는 미확인 지뢰도 종종 발생하는 사고의 원인이다. 초소 당 20발 정도의 크레모아도 설치되어 있다. 옆 부대에서 크레모아를 잘못 다뤄 큰 사고가 났었다. 우리 중대에서도 사고로 사망한 일병(경기 화전)이 있어 중대 대표로 춘천의 야전병원에 조문 간 일이 있다. 이미 화장을 마치고 떠나 조문을 못하고 옆 대대 크레모아 사고 병사들의 병상을 찾아보았다. 얼굴은 새까맣게 그을리고 팔을 절단한 끔직한 모습으로 누워있어 차마 똑바로 쳐다보기가 민망했다.
소대장으로 복무하는 동안 함께한 우리 대원 모두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고 안전 귀향했다는 사실을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전역후 예비군 훈련장에서 만난 소대원 서정관(충남/대전)이 야간 근무중 고참병인 김성술(전남 화순)에게 여러번 구타를 당해 앙심을 품고 배에다 쏴 죽이겠다고 총구를 들이대니 김성술이가 파랗게 질려서 사과를 한 일이 있다고 말했다.
초소 이야기(19)
마달리 작전
군대에서 제일 통제하기 어려운 일이 술(음주)과 여자다. 혈기 왕성한 젊은 청춘들이 모여 생활하다보니 술은 어떤 통제를 가해도 기술 좋게 빠져나가는 구멍을 찾아낸다. 철책선 부대 800~1,000m 고지에서 생활은 여자는 못 데려가지만 술은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해 보급을 받는다.
근무자의 음주 행위는 영창에 들어갈 수도 있고 참모총장의 '삼훈오계'라는 금주령도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소대에서 술을 구하려면 '마달리'라는 민통선 마을 까지 내려가야 한다. 서울로 치면 관악산 꼭대기서 사당동 정도 먼 길이다. 중간에 수색대가 주둔하고 있어 검문소를 통과하는 위험도 따른다.
철책선 에서도 한두 달에 한명 정도의 전역자가 나온다. 대한민국 최동북단 오지에서 3년간 힘들고 험한 군복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자랑스런 병사들이다. 전역을 1주일 쯤 앞둔 시점이면 소대장과 항상 가까이 지내는 상황병이 소대장의 기분을 살펴가며 소대장실 문을 노크하며 들어온다. "소대장님 이번에 김병장이 전역하는데 그대로 보내기 서운 합니다"라고 눈치를 살피며 썰을 풀어댄다. 한마디로 말해 마달리로 술 보급 작전을 허락해달라는 얘기다. 우리는 통상 '마달리 작전'이라 불렀다. " 야 임마 지금 상황이 어느 땐데 그따위 소리를 하느냐"고 인상을 써가며 말하지만 이것도 다 초소장의 작전이다. 너무 호락호락 허락해주면 분위기가 풀어져 사고의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상황병의 설득에 못이기는 척 들어주며 이번 작전에는 누가 뛸 것인지 정한다. 발 빠르고 눈치 빠른 상병 중에서 3명을 선발한다. 선발된 대원 3명을 앞에 세우고 소대장이 다시 한 번 다짐을 받는다. 마달리 까지 뛰어 내려가는데 2시간 경월소주 1짝 짊어지고 올라오는데 3시간 도합 5시간 내에 작전을 끝내는 조건으로 허락한다. 철책선 부대에서 비무장으로 병사들이 이동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사전 보고 없이 병력이 지역 이탈하는 책임은 모두 소대장이 져야하는 위험 부담이다.
한번은 마달리 작전 내려 보낸 직후 갑자기 내린 여름 폭우로 계곡물이 불어났고, 산은 짙은 안개에 덮여 앞을 내다보기 어려웠다. 대원들은 약속 시간 2시간이 넘도록 소식이 없다. 날은 어두워져 앞이 안 보인다. 안개에 덮인 계곡을 내려다보며 중대장에게 보고를 하고 병력을 풀어 수색 작전을 해야 할지 안절 부절 가슴 조였던 마달리 작전,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던 경험이다.
회식이 끝나면 나는 다시 긴장한다. 이날 밤 만큼은 잠을 자지 않고 대원들과 밤새도록 순찰 활동을 함께 한다. 가끔 술 취한 대원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따금 약삭빠른 고참 대원이 있어 마달리 작전을 다녀오며 술병을 한 병 빼돌려 초소 아래 풀숲에 감추어두고 근무 중 불법 음주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역 후에 대원들과 회식자리에서 전해 들었다.
지금 까지 수많은 회식 자리를 경험 했지만, 지하 벙커 안에서 대원들과 함께 했던 신나고 스릴 넘치던 그런 회식자리는 가져보지 못했다.
초소 이야기(20)
소대 회식
벙커 안에서의 소대 회식은 정말 멋있다. 나는 회식 군기를 잡기위해 언제나 전 대원들이 침상에 집합한 상태에서 차렷 자세로 시작과 마침 보고를 철저히 받았다. 모처럼 오랜만에 술이 들어가면 평상시의 기강이 무너지고 사고의 위험성이 높기 때문이다. 경험에 의하면 남자들의 세계에서 술이 들어가면 열에 한 명 정도 꼭 이성을 잃고 행동하는 사람이 나온다.
중대 본부 쪽에서 내려오는 순찰로 한 곳에만 경계병을 내보내고 전 대원을 회식에 참가시킨다. 중대 본부에서도 어느 소대에 전역자가 있다고 알고 있다. 노련한 중대장은 소대에서 보고 없이 회식을 하는지 항상 감시의 촉각을 세우고 있다.
회식은 대원들 모두 아래위 침상에 앉은 차렷자세로 정열 해 회식 보고를 하며 시작된다. 취사병은 부족한 부식이지만 특별 안주를 만들어 내온다. 경월소주 댓병(1.8L) 4개가 들어오면 고참병 순으로 반합 뚜껑 술잔이 돌아간다. 분대장과 고참병은 2~3개 정도 돌아가고 신참병은 가까스로 1개 정도 받아 마시며 감지덕지한다. 4병이면 대원들 주량에 적당하다. 회식은 취기가 올라가는 상태에서 조금 아쉬운 맘으로 끝내도록 햐는 게 좋다. 분위기에 휩쓸려 한 두병 더 들어오면 정말 위험하다. 만취되어 이성을 잃는 대원이 나오면 속수무책이다. 사고는 곧 인사사고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하 벙커이기 때문에 아무리 큰 소리를 질러대도 밖으로 새나가지 않는다. 취사장에서 가져온 식판 물통 철제 양동이등이 악기로 등장한다. 밀페 지하공간에서 30여명이 목청껏 질러대는 함성과 철제 양동이 두드리는 소리에 지하 벙커는 열기가 폭발 직전 까지 올라간다. 얼마 전에 히트한 '난타'는 우리가 원조인 셈이다. 주로 불렀던 노래는 '전선 편지' '삼팔선의 봄' 당시 유행했던 '나는 못난이' 그리고 여체의 몸을 비유해 개사한 '진지투입가'가 기억된다.
초소 이야기(21)
금강산 화폭에 담다
1976~7년 철책선 까치봉 자락에서 금강산의 전경을 매일 바라보며 생활한 날들이 있었다.
여름날 한 차례 소나기가 지나가면 계곡엔 산안개가 피어오른다.
구름들이 북쪽 하늘로 몰려가는 광경을 바라보며 서있노라니 가슴 이 울렁이고 목이메었다. 그 감동을 잊을 수 없어 휴가자 편에 구입해온 스케치북과 4B 연필로 금강산 풍광을 여러번 스케치해 담았다. 아마도 조선시대 정선이 금강산 전도를 그린 후 금강산 실경 일만 이천 봉을 바라보며 화폭에 담은 이는 내가 처음 아닐까하는 자부심도 갖는다.
누구든지 금강산을 바라보면 감탄사를 터트린다. 화가는 금강산의 전모를 그려 그 감동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인다
많은 화가들이 금강산을 화폭에 담아냈다. 금강산은 많은 봉우리와 계곡으로이루어진 거대한 집합체다.
화가들은 붓과 캔버스를 들고 계곡으로 들어 갔었다. 그들이 담을 수 있는 모습은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금강산의 전경을 한폭의 화폭에 담아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상의 전모를 담아내려면 조금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던지 하늘에 높이떠서 바라보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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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산수화를 이땅에 처음으로 선 보인 정선
얼마나 감동을 받았으면 스스로 한마리 새가되어 하늘에서 바라본 금강산의 모습을 그리고 금강산전도라 이름붙였을까.
이때 스케치한 화폭 하나를 전역 후 유화로 그려 우리 집 벽에 걸어놓았다. 젊은 청춘으로 돌아가 그때의 황홀경에 다시 한 번 빠져보는 와유(臥遊)의 호사를 누린다.
금강산을 마주하고 있으면 누구든지 시심이 절로 일어 시인이 되어 글로 표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까치봉
일만 이천 봉우리 막내둥이
남강 물안개 피어오르면
비로봉 더 높아 보여
철책선 푸른 능선 할퀴며
동해로 달려도
고진동 까마귀 떼
남북을 넘나든다
철조망에 걸린 둥근달 보며
눈물 흘린 초병 얼마이든가
갈대숲 고라니 강 건너가고파
오늘밤도 피토하며 운다.
갯목련(한중섭)
비로봉하 금강연봉이
눈 앞의 병풍만 같아라
낮이면 건봉산 그림자에
묻혀졸다
한게령 넘나드는 구름에
손 흔드는 까치봉
봉우리 뒤통수는 동해를
힐금거리고
봄이면 비탈에서서
목련꽃을 피운다
물어 물어 먼길 찾아온
그리운 님이던가
한맺혀 이정표로
변해버린
전설 속의 그 선녀던가
탈속의 그 자태 그 향기
세진에 찌든 넋은
숨을 멈추고
거칠어진 볼을 한없이 부빈다.
* 한중섭(RO13기/성균관대)님은 나와 같은 시기에 철책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갯목련은 한중위가 1977년 까치봉에서 함께 군생활을 할 때 써서 보내준 작품이다)
금강산 예찬 모음
-이사벨라 버드 비숍/1984,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단발령에서>
사당에서 정상을 올려다보면 가슴이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진다.
구비구비 이어진 숲의 물결, 시냇물의 아스라한 반짝임 구릉의 완만한 산들, 그 뒤로 해발 1638m가 넘는 금강산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가 솟아있다.
아 나는 그 아름다움 그 장관을 붓끝으로 표현할 자신이없다. 진정 약속의 땅인저 진정코!
_ 이율곡/금강산 유람기;이율곡 16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3년간 시묘살이후 19세 금강산 입산
600구 3000자의 오언 장편시와 60구 420자 칠언 장편시를 남김
<천하 명산 개골산>
"아름다운 이름 세상에 알려져
모두들 이땅에서 태어나길 바랬네
공동산 부주산은
이곳 비교면 보잘것 없네
이제야 알겠노라 조물주 솜씨
여기 향해 그 힘 다한줄을
이름만 들어도 사모하게되덧던 너
하물며 멀지 않은 곳에 있음에랴"
<단발령>
점차 아름다운 경지 들어가니 漸漸入佳景
걸어온 오솔길 지루함잊었네 ㅇ 忘行逕永
참 모습 보고자 欲見眞面目
곳장 단발령 올라서니 ㅇ登斷髮嶺
일만이천 봉우리 一萬二千峯
눈길 닿는데 마다 맑기만 하여라 極目차淸淨
아지랑이 휘몰아쳐 바람에 흩어지고 浮ㅇ散長風
우뚝 솓은 봉우리 허공을 버티네 突ㅇ장 靑空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기쁜데 遠望已可嬉
더욱이 산속에서 유람하네 何況遊山中
홀연히 지팡이 끄니 ㅇ然ㅇ 靑杖
산길 끝이없구나 山路更貿窮
-이곡/東遊記 1349.8.14~9.21
<단발령>
재가 공중 가로질러 기러기 자나가지 못해 絶嶺橫空雁過難
재 위에서 머리돌려 길게 한숨 쉬노라 嶺頭回首一長歎
구름 안개로 풍악산 덮게 한다해도 終敎雲霧埋楓嶽
내 이미 올랐으니 맘껏 구경하노라 我已登臨恣意看
-남효은1485.4.15~윤4.20
<장안사>
부처에 아첨한 소랑 창생을 박해했는데
서쪽에서 온 이유는 세상을 밝히려함이네
소림사 십년 면벽
어찌 인간에 명예욕 이야기할 줄 생각했으랴
-김창협/東遊記 1671.8.11~9.10 효종때 김상현의 증손, 부친 유배시 사사 목격후 벼슬 단념 은둔생활
<금강산>
성스러운 산 더위 받지 않고 靈山不受暑
우뚝 솓아 절로 맑고 높구나 落落子淸峻
불꽃 같은 구름 하늘 가득 火雲亂滿天
내 소매 바람에 휘날리누나 風ㅇ吾得振
말에서 내려 수목 사이 지나니 不馬歷ㅇ檜
물은 맑고 돌은 번쩍번쩍 빛나 水淸石ㅇㅇ
승경을 찾음 이제 여기부터 幽討方自玆
슬금슬금 걸어 앞으로 나가보리 ㅇㅇ 且前進
-이상수/東行山水記1820~`1882
<단발령>
동쪽 하늘 파랄 때 지자이 멈추었더니 東天一碧駐ㅇ枝
산빛 구름 함께 햇볕에 찬란하다 黛色參雲郁日時
애석한건 반공에 하야게 쌓인 눈때문 可惜皎然天半雪
봄은 깊건만 아미산을 볼 곳 없네 春深無處見蛾眉
* 금강산 구경은 단발령에서 시작한다. 왜 단발령이라 하는가?
맑은 하늘에 석양빛이 반사할때 하얀 빛이 솟아나는 것을 바라보면
정신이 아찔하여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삭발하고 승려가되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방랑시인 김삿갓
금강산 金剛山
松松栢栢岩岩廻
소나무 잣나무 바위가 돌고돌아 水水山山處處奇
물과 산이 곳곳이 기묘하도다
큰 산이 뒤에 있으니 하늘은 북이 없고 泰山在後 天無北
큰 바다가 앞에 있으니 大海當前 地尽東
땅은 동쪽에서 끝나도다
다리 아래로 동서남북 길이 뻗어있고 橋下 東西南北路
지팡이든 머리에는 일만이천봉이 걸렸도다 杖头一萬二千峰
초소 이야기(22)
봄 소풍
태백준령 산 골자기에 겨우내 쌓였던 눈이 녹고 따스한 햇볕이 쏟아지는 일요일 이었다. 전역을 2개월 여 앞둔 마지막 예비대 생활을 할때다. 당직 사관을을 맡아 보는 날이다. 일요일에는 항상 훈련이나 교육이 없는 자유시간이다. 연병장에서 소대단위 축구 시합도 하고 대원들은 이발이나 정비 시간을 갖는다.
후보생 시절 하계 훈련 받으며 가장 즐거웠던 시간은 부대 를 벗어나 세탁물을 가지고 야외에 나가 옷 세탁도하며 시원한 물에 몸을 적셔 보았던 생각이 났다. 짧지만 답답하고 조금은 공포스런 영내를 벗어나 자유를 맛보는 시간이었다.
몇일 전에 중대에 들어온 신병들을 점검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최전방 산골짝으로 부대 배치 받아 고참병들과 함께하며 긴장하고 있을텐데 긴장을 조금 풀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들어온 신병들 세탁물 들고 집합하라고 전달 명을 내렸다. 10명 정도의 신병들이 세탁물들을 옆구리에 끼고 총알 같이 연병장에 집합했다. 신병들을 인솔해 부대 후문을 나와 북천강으로 향했다. 진부령 골자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길을 북천강이라 이름 붙었으나 들판을 가로 질러 흐르는 조금 큰 시냇물이다.
신병 10명 정도를 데리고 500미터 남짓 밭둑 길을 가로질러 단체로 세탁하기 좋은 볕이 잘드는 둑방에 자리를 잡았다.
개울가 에 자연스럽게 둘러 앉았다. 긴장된 맘으로 소대장인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신병들을 모아놓고 한명 한명 얼굴을 둘러보았다. 모두 다 앳된 얼굴들 막내 동생 처럼 보였다. 충분한 세탁 시간을 주고 개울 에 내려가 세탁물을 깨 끗하게 세탁 한 다음 이곳에 다시 집합하라고 했다.
신병들은 개울가에 자리잡고 세탁물을 강물에 빨면서 시원한 물에 얼굴과 손발도 씻고 물 장난도하며 모처럼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모습을 둑방 위에서 내려다보며 후보생시절 병영훈련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이제 다음달 정도에 다시 산에 올라가고 2개월 후면 전역하는데 이들은 이제부터 3년을 견디고 이겨내야한다.
신병들이 세탁을 다 끝내고 다시 개울가에 집합했다. 이제 막 군생활을 시작하는 신병들에게 장교로서 군 선배로서 말해주고 싶었다.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태어나 현역병으로 3년 군생활은 어디서도 해볼 수 없는 큰 경험이고 자산이다. 이제 한 달 후에는 휴전선 철책 경계를 하러 산에 올라가게 될 것이다. 총들고 철책선 경계를 서보았다는 자부심을 가질만하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이 있으나 젊은이로서 모두 견딜만한 일이다. 여기 모인 입대 동기들은 지금도 만나면 반가운 친구지만 평생 잊지못할 친구가 될 수도 있다. 단지 조심해야 할 것은 불필요한 행동이나 지시받지 않은 행동으로 생기는 안전 사고에 주의해야 한다. 대략 이런 말들을 해주었다.
둘러앉아 간단한 오락시간을 가졌다. 노래 제목은 내가 선정했다. 국민학교 음악책에 실린 노래들이다.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나의 살던 고향은' '뻐국뻑국 뻑국새 산에서 울고' 같은 동요 몇 곡을 불렀다.
둑방 넘어로 신병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신병들과 함께한 마지막 봄 소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