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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을 만나보고 가는 길

Sam1212 2011. 9. 30. 14:37

 

 

연산군을 만나보고 가는 길. (북한산둘레길:왕실묘역길/방학동길)

 

북한산둘레길 주말 걷기를 다시 시작하였다. 금년에 새로 조성된 '도봉산'과 '사패산'을 감아 도는 코스다.

 

작년 북한산 둘레길 탐방 시작한 날짜를 확인해보니 9월 25일이었다. 작년보다 한 달 일찍 탐방을 시작하는 셈이다. 올해는 여름에 비가 많더니 8월 말인데 늦더위가 심하다. 한 낮 땡볕이 너무 심해 점심을 집에서 하고 좀 늦게 출발했는데도 습도까지 높은 열기에 숨이 턱턱 막힌다. 수유역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종점에 내리니 작년에 마지막 탐방을 마친 '우이령' 입구다.

 

 우이동이나 수유리에 올 때마다 느끼는 감정인데 도심을 병풍같이 둘러쌓고 있는 북한산의 그 웅장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을 주는 산세는 바라볼 때마다 탄성이 절로 나오게 한다. 세계 어느 대도시에도 이렇게 멋진 산을 배경으로 도심이 들어선 곳은 없을 것이다.

 

 

 작년 여름에 계곡 옆을 흉물스럽게 파헤치며 공사를 벌이던 현장은 오늘 보니 제법 건축물이 완공 단계에 이르렀다. 아름다운 북한산을 배경으로 한 숙박시설 단지는, 공사 허가받은 배경을 두고 언론의 질타를 받았던 현장이다.

 

길가 노점상에서 잘 익은 옥수수 2개를 사서 아내와 함께 먹어가며 오늘의 탐방코스인 '왕실묘역구간'을 따라 가다 길을 잃었다. 갈림길에 안내판이 없어 한참을 걸어가다 다시 돌아와 버스를 기다리는 등산객에게 물었다. 우리가 걸어 올라갔던 찻길이 둘레길 코스가 맞다 한다. 다시 뒤돌아 차 길을 따라 걸었다.

 

 안내 표시는 갈림길에서 중요하다. 곧게 뻗은 길에서는 큰 어려움이 없으나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면 큰 고생을 하게 된다. 산행길이나 사람의 인생길이나 갈림길에 서면 조심해야한다. 정확한 선택 빠른 결단 그리고 잘못을 알아차렸을 땐 빨리 되돌아가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상책이다.

 

차 길 언덕위에서 탐방로는 우측 산길로 들어선다. 새로 난 나무 계단을 올라 산길로 접어드니 울창한 숲엔 그늘이 들어 조금 시원하다. 날씨는 거구로 삼복더위인데 숲속에선 가을을 알리는 쓰르라미 울음소리 요란하다.

 

길가에 쉼터 전망대 있어 올라보니 멀리 좌측 산마루에 북한산 인수봉이 아스라이보이고 우측엔 도봉산의 암봉들이 하늘가에 닿아있다. 인수봉위에 헬기 한대가 요란한 소음을내며 날고있다. 아마 등산객의 사고가있는 모양이다.

 

숲속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길은 언제 걸어도 정취가 있다. 길가 나무에 붙어있는 나무 소개 표찰들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이름도 있고 나무에 대한 상식도 많이 는다. 한국에 살면서 소나무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흔한 소나무에도 소개 표찰이 붙어있다.

 

 이곳 구간에서 유독 눈에 많이 띠는 리기다소나무는 토종 소나무에 비하면 전혀 운치가 없다. 둥치에서 비죽비죽 돋아나는 솔잎은 마치 곤충 다리에 성글게 돋은 털처럼 징그럽게 보인다. 리기다소나무나 물오리나무는 60년대 민둥산이었을 적에 사방 조림으로 심은 수종들이다.

 

상수리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는 나무 잎만 보면 구분하기가 어렵다. 이번 둘레길을 걸으며 손쉽게 구분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굴참나무는 껍질이 가장 두껍고 신갈나무의 껍질이 가장 얇고 매끄럽다. 내가 시골에서 자랄 때 도토리나무로 불리던 수종은 어디에 들어가는지 궁금하다.

 

 재미있는 나무 이름들도 참 많다. 국수나무는 습지나 계곡의 물가에 많이 서식하고 있다. 물을 푸르게 만든다는 의미를 가진 물푸레나무는 목질이 강하면서도 유연해 농촌에서 농기구를 만드는데 많이 쓰인다. 가을에 단풍이 붉게 물든다고 형용사로 이름 지어진 '붉'나무도있다.

 

얼마 전부터 수목원에서 숲 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친구 용환이와 함께 걸으면서 좀 더 깊이 있는 대화를 해보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는데 아직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그의 숲과 나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나의 궁금증들을 시원하게 풀어줄 것을 기대하며 이번 가을엔 꼭 한번 함께 걸으며 숲과 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 보려한다.

 

친구가 숲 해설가라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나의 의견을 물어왔을 때 나는 정말로 가장 멋지고 보람 있는 일이 될 거라며 적극 찬성하였다. 다가오는 노년을 평소에 좋아하던 나무와 숲을 매일 함께하며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생활인가!

 

이 구간의 명칭이 '왕실묘역구간' 이다. 안내판에도 연산군 묘와 정의공주 묘가 그려져 있다. 숲길을 걸어가다 보면 길가에 꽤 커다란 봉분의 묘 몇 기가 나타난다. 그 때 마다 옆에서 함께 걷던 아내가 연산군 묘인 줄로 알고 달려간다. 그러나 정작 연산군 묘역은 산길이 다 끝나고 방학동 산자락 동네의 커다란 성냥 곽 아파트가 시야에 우뚝 들어올 때 나타났다.

 

 연산군 묘역보다 탐방객을 멀리서부터 뛰어나와 반갑게 맞이하는 이가 있으니 묘역 앞에 우뚝 버티고선 수령이 800년이나 된 은행나무다. 계산해보니 연산군의 묘역이 자리 잡기 전에 이미 300년이나 된 거목이었다. 높이가 24미터 둘레가 9.6미터로 내가 산책코스로 즐겨 찾는 몽촌토성위의 400백년 된 거목 은행나무보다도 배는 커 보인다.

 

 

 하늘 향해 수직으로 힘차게 뻗어나간 둥치와 동서남북 사방으로 활달하게 뻗은 가지는 8백 년 험난한 풍상에도 어느 한 곳 부러진 가지가 없어 보이고 앞으로도 800년은 더 청청하게 버텨낼 기상이다.

 

은행나무 뒤 산자락에 있는 연산군 묘역에 들어갔다. 조선의 다른 왕릉보다 묘역의 규모는 작지만 여러 기의 봉분들이 함께 있어 그런대로 왕실 묘역으로서 품위와 기품을 지킨다. 많은 봉분들 중에서 연산군 묘는 맨 위 우측이다.

 

연산군은 우리 민족사에 기록된 군주 중에서 폭군을 대표한다. 조선 왕조사를 들여다보면 왕권과 신권의 쟁투가 많았다. 왕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지존으로서 항상 최고의 권력자가 되지는 못했다.

 

왕을 보위하는 신하의 권력이 왕의 권력을 능가하는 시기도 많았다. 연산군은 우위에 있던 신권을 가차 없이 끌어내리고 절대 왕권을 쟁취한 군주다. 크게 보면 모든 정치 행위는 권력 투쟁을 수반한다. 그 투쟁의 목적은 저마다 민족 애국 발전 민생이란 존귀하고 아름다운 이름으로 포장되어있다.

 

 

 

 

 

폭군이란 오명을 후세에 남긴 채 한줌의 흙이 되어 묻혀있는 연산군의 봉분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한 나라의 지존으로서 그에 합당한 최고의 권력을 함께하려는 권력자의 통치술을 이해한다. 자신을 낳아준 어미의 참담한 죽음을 철이 들어 전해 듣고 애통해하고 분노하지 않았다면 어찌 자식이라 말할 수 있는가! 이 또한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가 범한 패륜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훌쩍 넘어가버렸다.

 

일반적으로 모든 절대 권력은 내적 자제력을 잃으면 사냥 음주 가무의 사치에 빠지고 호색과 음행으로 끝없이 치닫는다. 절대 권력이 통치의 본질인 민생을 떠나 쾌락을 쫒을 때 남는 건 개인적인 허무와 후세에 악명만이 남는다. 연산군은 자제력을 잃은 절대 권력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폭군이었다.

 

정의공주묘역 앞에서 또다시 길을 잘 못 들어 또 한 번 오락가락했다. 이곳에서 왕실 묘역구간이 끝나고 산길로 접어들어 방학동길이 이어진다.

 

 

북한산에 올라 의정부로 넘어가는 도봉산 자락의 울창한 능선을 매번 바라볼 때면 멈출 줄 모르고 팽창하는 도심의 개발에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도봉산 의 수림대가 대견스러웠다. 지금 산위에서 내려다보던 그 숲속을 걸어가고 있다.

 

산자락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져나가는 숲길은 이따금 쉼터가 나오기도 하고 서울에서 보기 힘든 작은 포도밭 옆을 지나 가기도한다. 포도밭을 지나고부터는 산길이 오르락내리락 험해진다. 산행하는 사람들에겐 이정도의 길은 가벼운 등산길이지만 무릎 관절이 아픈 내에겐 제법 조심스런 험로다. 걷는 속도를 더 줄이고 한발 한발 내 디딜 때마다 발끝에 신경을 집중시키고 산길을 걸어올라 나갔다.

 

산길을 오르내릴 때 가장 조심스런 일은 경사길 위에 흩어져있는 작은 알갱이 돌이다. 우리나라의 대부분 산들은 화강암반의 석산으로 화강암이 풍화되면서 만들어진 콩 알 만 한 돌들이 산행 길에 많이 깔려있다. 이 작은 돌들이 잘못 밟으면 미끄러지면서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다치게 된다.

 

오르막길이 끝나자 이제는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산 능선을 따라 내려가는 길이 이어지고 있다. 무릎이 성ㅎ치 않은 사람은 오르막보다 내리막이 더 힘들다.

 

둘레길을 새로 만들면서 많은 구간은 이전부터 등산객들이 이용하던 등산로를 그대로 활용했다. 산길을 새로 내는데 불필요한 자연 회손을 최소화하는 노력을 기울인 것은 아주 바람직한 설계로 생각된다.

 

이 구간의 내리막길을 걸어가면서 보니 이전에 나뭇가지를 잘라 만든 계단이 많이 눈에 띤다. 요즘 새로 난 길은 방부 처리된 회갈색의 규격화된 판자를 사용 계단을 만들었다. 이곳의 나뭇가지를 베어 만든 계단이 훨씬 자연스럽고 운치가있다. 휘어지고 가지 친 나뭇가지를 엇갈리게 맛 물림으로 사용해 구조적으로도 튼튼할 뿐 아니라 기하학적 조형미와가 훌륭하다.

 

 나는 카메라를 메고 따라오던 아내에게 나무계단을 가리키며 사진을 찍으라고 권했다. 더불어 내가 북한산둘레길 아름다운 10경을 선정하라면 이 나무계단을 넣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산길에 작은 나무계단을 만든 사람이지만 분명히 대단한 미감과 공학적 개념을 가진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공사라도 이런 정신을 가진 분들이 대접받고 크는 세상이 되어야 선진국이고 격조 높은 사회가 된다.

 

아내는 요즘 카메라를 새로 장만한 뒤로 작품 사진 촬영한다며 사진 찍기에 푹 빠져있다. 나와 함께 야외에 나가면 멋진 풍광을 접할 때마다 카메라 앵글을 들이댄다. 나는 이때마다 한마디 한다. 그렇게 남들도 다함께 보고 멋있다고 찾아내는 장면은 누구나 다 찍을 수 있는 평범한 작품이다. 나만이 찾아낼 수 있는 장면을 포착해 담아야 진짜 작품이 나온다고 말해준다.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찾아내는 아름다움이나 진실의 순간이 훌륭한 작품이 되고 보는 사람에게 도 감동을 전해준다.

 

내리막 숲길을 따라 느릿느릿 걸어 내려오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덧 해는 도봉능선 위 두 뼘 정도에 걸려있다. 마침 산길을 올라오는 이가 있어 쌍둥이 전망대가 아직 멀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5분 정도만 더 걸으면 나온다고 했다. 나는 아내에게 시간 참 잘 맞추어 걸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전망대에 도착하면 붉게 물든 하늘이 사진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둘레길을 걸으면서 새로 만든 전망대를 들릴 때마다 참 위치를 잘 잡았다는 생각이 든다. '흰구름길' 전망대도 좋았고 '구름정원길' 전망대도 좋았다. 숲속 산길 걷기의 답답함이 조금 느껴질 때 쯤 되면 전망대가 나타난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 갈증을 푸는 느낌이 들기 도 하고, 통상 등산하는 사람들이 맛보는 정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쾌감을 정상을 오르지 않고서도 맛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쌍둥이 전망대는 2개의 전망대로 각기 다른 계단을 걸어 올라가서 전망대위에선 하나의 공간으로 만나게 설계되어있다. 소라껍질 속처럼 빙글빙글 돌아 올라가 전망대에 올랐다. 예상했던 대로 도봉산위 옅게 깔려있는 구름을 오렌지 빛으로 물들이며 만들어내는 저녁노을이 일품이다.

 

 

아내는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나는 북한산과 도봉산의 노을에 취해서 정신을 놓고 바라보다 배낭에서 스케치북 꺼내 북한산의 노을을 한 장 담았다. 이달 말 쯤 이면 북한산 자락에 단풍이 불타오를 것이다. 3년 전 혼자서 동장대에 올라 진달래능선을 걸어 내려온 적이 있다. 그때 단풍으로 물든 진달능선에서 뒤돌아본 백운대의 모습이 얼마나 환상적이었던지 몇 걸음 걸어가다 뒤돌아보기를 수 십 번 결국은 숲속에서 해가지고 어둠속을 헤치고 가까스로 계곡을 빠져나온 기억이 있다.

 

 

시선을 남으로 돌리니 서울의 북동부 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아차산 불암산의 턱밑까지 아파트들이 빼곡하게 들어차있다. 80년대만 하더라도 '마들평야'와 듬성듬성 보이는 작은 산과 학교의 교정들이 답답한 도심의 숨구멍 역할을 하였다. 이제는 레고 블럭 모양의 아파들이 들판을 꽉 채우고 삐죽삐죽 볼품없이 튀어나온 빌딩들이 북한산 자락 밑에까지 기어 올라와 있다.

 

나는 서울이 세계의 대도시들 중에서 가장 좋은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장 몰개성적인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한다. 서울은 도심을 관통하는 시원한 한강과 북쪽에 둘러선 북한산과 도봉산의 그림 같은 봉우리들 그리고 한 시간을 서쪽으로 달려 나가면 바다도 바라볼 수 있다. 이런 좋은 환경 여건을 갖추고 1000만 인구를 수용한 도시는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북한산에 오를 때 마다 이곳을 도읍으로 정한 태조이성계와 정도전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이 좋은 도시 환경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개성 넘치는 세계적인 도시로 만들어가지 못하는 오늘의 도시 행정 관료들이 한심스럽고 원망스러울 뿐이다. 이제는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6,70년대도 아니고 충분한 시간과 예산이 뒤따르는 상태에서 기껏 만들어내는 일들이 남아 있는 도시공간을 레고 블록 같은 아파트로 채워나가고 강변을 가꾼다며 잔디와 번쩍이는 대리석을 까는 일을 하고 있다.

 

 1000만의 대도시엔 전통가옥 지구도 있고 도시빈민의 지역도 당연히 있을 수 있다. 이 모든 지역을 재개발이란이름으로 밀어버리고 고층 시멘트 기둥 같은 획일적인 집단거주시설로 채우려는 발상을 하는 행정 관료들이 한심스럽다.

 

이들은 짧은 임기동안 자신의 이름으로 유형의 무었을 남기고자하는 공명심에 가득 차 있다. 언제쯤 우리는 풍부한 상상력과 예술적 감성을 가지고 역사를 길게 내다보는 바보스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내리막 산길에서 보았던 나무계단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 사람이 서울시장이나 문화재청장 자리에 있어야한다는 생각을 전망대위에서 해보았다.

 

해가 북한산 너머로 가라앉은 후에 전망대에서 내려왔다. 산길은 구불구불 이어져 나간다. 안내판에는 '무수골'이라고 표기된 곳도 있고 도봉옛길이라고 표기되어 있기도 해 조금 혼란스럽다. 능선에서 완전히 내려서니 넓은 골이 확 펼쳐진다.

 

 

개발제한 구역 이라 그런지 집들은 보이지 않고 조각조각 난 밭이랑 마다 번호표가 붙어있는 걸로 보니 주말농장이다. 개인이 운영하는 곳인지 지자체에서 운영하는지 모르지만 제법 큰 주말농장이다. 통상 서울의 산자락 밑에는 무허가 건물들이나 현란한 간판을 내건 식당들이 난립하고 있어 인상이 좋지 않은데 이곳은 제법 잘 정돈되어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이들을 상쾌한 기분으로 맞이한다. 밭에는 일요일을 맞아 채소에 물을 주거나 새로 씨앗을 심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보인다.

 

골자기를 걸어 나오며 '무수골'이란 이름에 자꾸 궁금증이 발동했다. 전래하는 이곳의 이름인지 한자로 표기된 이름인지 궁금하다. 우리 고향에선 '무'를 통상 '무수'라 불렀다. 아마도 이곳 마을에 무를 많이 심어 '무수골'이라 불렸을지도 있다는 생각을 혼자 해보았다. 북한산 둘레길 도봉산구간 첫 날 걷기는 버스와 전철을 여러 번 다시 갈아타고 밤 8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2011.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