漁夫四時詞 /윤선도
앞개에 안개 거치고 뒤산에 해 비친다
배띠어라 배 띠어라
밤물은 거의 디고 낮물이 밀려온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강촌에 온갖 꽃이 먼 빛이 더욱 좋다
(春詞1)
날이 덥도다 물위에 고기 떳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갈매기 둘씩 셋씩 오락가락 하는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낚대는 쥐어잇다 탁주병 실었느냐
(春詞2)
우는 것이 뻐구긴가 푸른 것이 버들 숲인가
이어라 이어라
어촌 두어 집이 안개 속에 나락들락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말가한 깊은 소에 온갖 고기 뛰노는다
(春詞4)
예송리 마을은 해안 쪽으로 선조들이 조성한 방풍림이 잘 조성되어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무들 중에 고사했거나 고사중인 고목들이 몇 그루 보인다.
마을 중앙에 공동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에서 해변으로 나가는 길 끝에 老巨樹가 하나가 우뚝 버티고있다.
수백년 거친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막아섰던 젊은날의 흔적들이 옹이가되어 온몸에 훈장처럼 붙어있다.
바다를 향한 큰 두 가지는 고사되어 봄이왔어도 싹을 티우지못하고 있다.
잔가지 몇 개 둥치에 붙어있는 걸 보니 몇 해 전 까지 만 해도 잎을 틔웠던 모양이다.
나는 함께 온 일행들이 모두 바닷가로 내려간 후에도 이 노거수 옆에서 한 참을 머물렀다.
차마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젠 그 생명이 다해가지만 오랫동안 마을의 역사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게딱지 같은 띠집에 살며 해 뜨면 작은 목선을 노저어 거친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아 연명했던 어부들을 보았을것이다.
노년에 낙향하여 보길도에 들어온 윤선도의 풍류 넘치는 삶도 지켜보았을 것이다.
치열했던 어민들의 삶의 모습을 수 백년 동안지켜보다
이제는 관광버스를 타고 여행객 수 십 명이 함께 들어와 카메라와 스마트폰을 들고 바닷가로 몰려 나가는 세상을 바라보고있다.
즐거웠고 힘들었던 삶을 마칠 준비를 하는 노거수.
아무도 눈길 한 번 주지않고 지나가는 고목 앞에서 그의 자랑스런 모습을 작은 엽서에 그려 담았다.
석양이 비꼈으니 그만하여 돌아가자
돛 내려라 돛 내려라
버들이며 물꽃은 구비구비 새롭구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삼공을 부러워할쏘냐 만사를 생각하랴
(春詞8)
취하여 누웟다가 여울 아래 내려가련다
배 매어라 배매어라
낙홍이 흘러오니 도원이 가깝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인세 홍진이 얼마나 가렸는고
(春詞8)
내일이 또 없으리 봄밤이 얼마 만에 새리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낚대로 막대 삼고 시비를 찾아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부 생애는 이러구러 지내도다
(春詞10)
五友歌/윤선도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오리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더하여 무었하리.
구름 빚이 깨끗다 하나 검기를 자주한다
바람 소리 맑다하나 그칠 적이 많구나
조코도 그칠 이 없기는 물 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않을손 바위 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
구천의 뿌리 곧은 줄을 그로 하여 아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느냐
저리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에 광명이 너 만 한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 하니 배 벗인가 하노라.
상식으로 바라보면 보인다.
명승지가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아름다운 자연 조건을 구비해야 함은 물론이지 만 그 장소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어야 더욱 빛난다.
보길도의 세연정(명승34호)은 물과 바위 나무 그리고 한국 전통 정자가 한데 어울려 명승지 조건을 완비했다.
관련 스토리 중에서도 윤선도라는 한국 문학사의 욱뚝한 조선의 문신과 그의 작품 어부사시사가 등장하니 최고의 명승지다.
이번에 다시 찾은 보길도의 고산 윤선도 유적지는 처음 방문했던 15 년 전과 비교하니 시설물도 많아지고 좋아지고 편해지고 잘 관리되고 있었다.
부용동의 잘 가꾸어진 탐방로와 잘 중수된 낙서재 곡수당 동천석실 세연정을 다시 돌아보았다.
이젠 관광지 어딜가나 문화해설사의 관련 역사 문화 지식을 곁들인 설명은 탐방객의 이해와 감탄사를 연발케한다.
나는 역사 유적지를 탐방할 때 마다 내가 아는 역사 상식으로 현장을 재 구성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우리나라의 대부분 유적지 지상물은 목조 건물이었기에 많은 전화나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고 근대 또는 현대에 고증을 통해 재건축되었다.
이번 윤선도 유적지를 탐방하면서도 내 상식으로 들여다본 재 건축물들은 너무 과장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선도가 65세에 병자호란 항복의 울분을 못참아 제주도로 은거하려 내려가는 길,
보길도의 자연 경관에 감동을 받아 이 섬에 들어와 은거하며 노년의 삶을 즐겼다.
부용동의 산세를 문화해설사는 보기드문 금계포란형으로 위인이 태어날 지형이라 설명을 달았다.
풍수지리를 잘 모르는 내가 보아도 길지같아 보이고 신비감 마져들었다.
윤선도가 아무 연고없는 보길도에 노년의 둥지를 튼 이유는 이해가 갔다.
그러나 잘 복원된 낙서재와 곡수당 그리고 세연정의 건물들에 대해 내가 가지고있는 상식과 부합하지 않는 점이 너무 많다.
과연 윤선도가 당시 이렇게 호화스런 건물들을 짓고 연회를 열고 노후 생활을 즐겼는가?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에 들어와 생활했던 시기는17세기 후반이다.
한양에서 고관대작을 지냈다 해도 은거 생활을 하려는 은퇴 문신이 작은 섬에 이렇게 호사스런 건축물들을 여러채 지었다는데 의문이든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대략 1,000만 정도로 본다면 보길도 같은 오지에 많아야 10~20 가구 100 여명 정도의 어민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내륙에있는 농민들도 힘들게 살았는데 논도 없는작은섬 어민들의 생활이야 오죽했겠는가?
고기잡아 생계유지를 한다하지 만 지금처럼 모터 달린 어선도 아니고 신식 그물도 없을 당시 주거 생활과 어촌 풍경이 미루어 상상이 된다.
해안가 초가삼칸 여러 집 옹기종기 모여있고 선착장엔 작은 목선 몇 척 그리고 산비탈을 일구어 만든 밭에 작물을 심어져있을 풍경이 연상된다.
당시에 낙서재나 곡수당 세연정 같은 기와집을 지으려면 엄청난 재력과 노동력이 필요하다.
목재나 기와를 육지에서 운반해와야한다. 기와 공방은 적어도 당시 큰 고을인 나주나 강진에나 있었을 것이다.
보길도는 육지에서 뱃길로 도 한참 떨어진 곳이다.
기와 수 천장을 운반하려면 기와 공장에서 우마차나 등짐으로 수 십리길을 운반해 해안의 선착장에서 배로 보길도까지 옮겨야한다.
당시 지금처럼 우마차 다니는 길도 없고 모두 사람 등짐으로 날랐어야한다.
구한말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와 한양과 지방을 여행하며 당시의 주거 생활상을 사진으로 찍어 남겼다.
당시 조선 최대 도시 한양에도 민가들은 대부분 초가집이고 궁궐과 중심가 쪽에만 기와집들이 보인다.
어촌이나 농촌 풍경을 담은 사진에서는 기와집은 발견하기 어렵다.
관가를 제외하면 어쩌다 한 두집이다. 초가집 위주의 조선의 마을풍경을 서양인의 눈엔 초가집이 버섯 처럼 보여 '버섯 밭'이라는 표현을 썻다.
요즘 새로 재현한 옛 건축물들을 보면 과장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든다.
우리의 찬란한 역사를 강조하고,조상이 남긴 훌륭한 문화유산을 빛내기위해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쳐 재현 했을것으로 생각되나
과장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과장된 건축물들은 텔레비젼의 사극에 많이 등장하여 대중의 역사물을 바라보는 인식을 왜곡시켜놓았다는 생각이든다.
많은 관람자들이 깊은 생각없이 이런 재현 건축물들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10칸 자리 기와집을 지으려면 아름들이 소나무 목재 수 십개와 작은 나무 수 백개가 소요된다.
나무를 자르고 건조하고 반듯하게 깍고 홈을 파고 하는 일은 여러명의 목수가 수 개월에 걸쳐서 해야 하는 일이다.
요즘 처럼 전기톱 전기 대패 신식 공구를 사용하여 1,2 개월이면 뚝닥 해치울 수 있는 일들이 아니다.
복원지에서 검게 퇴색되었거나 이끼가 끼지 않은 돌들은 모두 근래 새로 축조한 석조물이다.
축대들을 보면 엄청 큰 바위돌을 사용했다. 모두 포크레인을 사용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남해의 고도 보길도에 은퇴한 문신이 들어와 노년을 보내며 궁궐 규모의 정자를 짓고 높은 축대위에 십여칸의 기와집을 짓고
여흥을 즐겼다는 설명은 내 상식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보길도 뿐 아니다. 서울의 북한산 높은 고지에 200~300 kg 화강암을 잘 다듬어 옛성벽을 재현해 놓았다.
모든 건축물은 당 시대의 국력과 재력의 산물이다.
조선이 그렇게 커다란 건축물들을 보길도에 북한산 고지에 세울 수 있는 국력과 부가 있었다면 청나라 오랑캐에게 섬나라 왜에게 허망하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조가 남긴 유적을 보기 좋게 단장하여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민족의 문화유산을 잘 보존해 후대에 남기 일은 중요하고 가치있다.
그러나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터무니없이 과장되어서도 안된다.
화려하게 복제품 세트장 같은 건물 보다는 이끼낀 주춧돌과 무너진 축대를 바라보며 옛 모습을 그려보는 여백의 미를 하나 쯤 남겨 놓기를 바란다.
고향 선산에 가보면 어린시절 풀숲에 작은 봉분 만 남아있던 작은 묘지들이 커다란 상석과 둘레석 그리고 키만한 비석이 새로 세워져있다.
조선 시대 그처럼 커다란 상석과 비석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정승을 지냈거나 엄청난 세도가 집안이었다.
모두 부를 일군 후손들이 조상의 묘들을 보기좋게 치장하여 외부에 보이기위한 정성의 표시다.
그것을 바라보는 관람자는 상식을 가지고 진실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