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옛길에는 도봉이 안 보인다.(북한산둘레길:도봉옛길)
도봉역에서 내려 전철역에 서서 북쪽 하늘을 올려다보니 플랫홈 건물 너머로 보이는 도봉산의 암봉이 일품이다.
역사를 나와 길을 건너 20분 정도 물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니 지난 주말에 내려왔던 무수골이 나온다. 오늘 걸을 구간은 무수골을 출발 도봉산 자락을 타고 다락원까지 가는 '도봉옛길'이다.
지난주에 무수골의 이름 해석을 하느라 힘들었는데 인터넷에 알아보니 무수골의 '무수'는 없을無 근심愁로 꽤 철학적 의미가 담겨있다. 근심 걱정이 없는 골자기라 하니 명당 중의 명당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산간 마을의 이름은 '밤나무골' '감나무골'과 같이 그 동네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나무에 또는 '안골' '뒷골'하며 골자기의 위치에 따라 이름을 붙인다. 지난달 산을 내려오면서 제일 많이 눈에 띠는 것이 배추 밭이라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는데 완전히 잘못 짚었다.
산길로 들어서니 곳곳에 커다란 묘지들이 눈에 들어온다. 봉분 앞에 이끼 낀 커다란 석물들이 보이는 곳도 있어 한 시대를 꽤 화려하게 살다 가신 분들이 누워있다는 생각이 든다.
산길을 따라 한참 오르다보니 커다란 비석이 길옆에 떡 버티고서있다. 석물의 질감으로 보아 만들어 세운지 오래되어 보이지 안 는다. 가까이 다가가 비문을 대충대충 읽어보니 후손들이 최근에 세운 것이다.
옆에 따라오던 아내가 비문에 한자로 새겨진 주인공 성이 같은 종씨라며 은근히 족보 있는 가문의 일원임을 내세우려한다. 내가 한마디 쏘아 붙였다. "죽어 땅에 뭍인 사람의 비문만 읽고서 그 사람 생전의 됨됨이를 평가하려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이다."
비문은 사람이 떠난 후에 그 사람을 칭송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의 공덕을 되도록 크게 확대하고 최대한의 미사여구를 덧붙여서 만들어낸 글이다. 공덕을 높이고자 지어낸 글이기에 그 사람의 저지른 실수나 또는 비행은 당연히 축소되고 숨겨주기 때문이다.
이곳 무수골에 묻힌 사람들은 그들의 염원대로 자손 번창하고 대대손손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데 근심 걱정 없기를 바랐을 것이다. 아무튼 이분은 후손들이 돌 거북등에 올라탄 커다란 비석을 세워주었으니 무수골의 정기를 마음껏 받은 셈이다.
묘지의 골짜기를 넘어 한참을 걸어가니 길 위에 절집이 나타난다. 고려 광종 때 혜거스님이 창건하였다는 '도봉사'다. 창건 연대를 계산하면 천년이 훌쩍 넘는 고찰인데 안에 들어가 둘러보니 세월이 만들어주는 고색창연과는 거리가 있다.
과거와 현대가 뒤섞이고 전통과 외래가 범벅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내가 기대하던 색 바랜 단청이 고풍스런 법당, 모서리가 조금 깨지고 마모되었지만 아직도 날렵한 곡선미가 살아있는 석탑, 이끼 낀 석등, 바람이 스쳐갈 때마다 산사의 정적을 깨는 풍경소리는 이제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가보다.
마이크를 타고 절집 밖까지 쩌렁쩌렁 퍼져나가는 독경소리는 비 불자의 조금 남아있던 고찰에 대한 경외심과 신비감마저 하늘을 향해 날려 보낸다. 몇 해 전 태고사에서 심금을 울리던 독경소리가 지금은 강을 건너는데 필요한 좋은 뗏목을 싸게 팔고 있다고 외치는 상인의 소리로 들리니 참 묘한 게 사람의 마음이다.
절문을 빠져나와 산길을 오르는데도 독경소리는 계속 따라오며 귀찮게 한다. 마조스님을 불러와 기와를 갈아 거울을 만드는 방법을 찾으셨는지 물어보고 마이크 볼륨 좀 낮추어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고개를 다 넘어 다시 청정한 숲속의 침묵에 빠져 들어가니 우리의 역사에 많은 전란이 있었고 도심 근처의 절에서 상상속의 고찰을 기대하는 나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산 둘레길을 걸으며 다른 곳에서 느낄 수없는 매력은 산자락과 능선을 걸어가면서 아래서 고개를 들고 바라다보는 북한산과 도봉산의 모습이다. 어느 곳에서 바라보더라도 모습을 조금씩 달리하지만 그 늠름하고 우람한 자태, 땅의 모든 기를 모아 하늘을 향해 용솟음쳐 오르는 힘찬 기상은 이곳 둘레길에서 만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이곳 도봉 옛길 구간은 도봉산의 정상의 웅장한 암 봉을 보기 힘들다. 숲길을 걸어가며 능선에 올라설 때마다 도봉의 암 봉이 나타나길 기대해보지만 좀 체로 모습을 내보이려 하지 않는다. 아마도 너무 가까이 다가온 방문객에게는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을 내보이기 싫어하는 심정 같아 보인다.
내리막길에 새로운 사찰이 나타났다. 멀리서 바라봐도 확연히 두드러 져 보이는 새로 지은 화려한 절집이다. 단청의 색깔도 전통적인 청 녹색 보다 황금색을 많이 사용하여 고급스럽고 부티가 난다. 절 문이 활짝 열려있는데도 안에 들어가 구경하는 관광객이 별로 없어 보여 아직 완공되지 않은 절로 잘못 알았다.
기와올린 매끈한 담장과 능원사란 편액이 걸린 화려한 문을 성큼 들어서니 절 마당은 반듯한 석재로 빈틈없이 깔아 흙 한 줌은 작은 돌 하나 찾아볼 수 없다. 대웅전 용마루 끝에는 커다란 황금색 새가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모형물이 올라가있다. 이런 장식물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일이 없어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든다.
사람의 마음은 이따금 이중성을 보이며 간사한 면이 있다. 화려하게 건축되는 종교 시설물을 바라보면 성스럽고 영광스럽다는 감정을 갖기보다는 숭고한 교의를 물질적 성장으로 왜곡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속되다는 감정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수 천 년 지난 유럽의 석조 신전이나 고풍스런 중세의 성당에 들어서거나 우리네 고찰의 웅장한 대웅전 앞에서면 종교가 가져다주는 신성함의 분위기에 쉽게 도취된다.
화려한 능원사의 절문을 나서며 언젠가 세월이 흐르면 황금색 단청도 빛이 바랠 것이고 윤기 흐르는 새하얀 석탑에도 검푸른 이끼에 덮일 것이다. 그때는 지나가는 나그네의 신심을 충분히 자극할 것이란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의 명산 어디를 가더라도 골자기마다 절집이 있어 불자가 아니라도 산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쉼터가 되고 때로는 무심한 대중에게도 불심이 일어 사유의 깊이를 더하게 만들기 도 한다.
하늘엔 솔개 날고
골짜기엔 물소리
이것은 色인가 空인가?
크게 한번 웃고 내 모습 바라보니
지친 몸 바위에 걸터앉은 나
저녁하늘 자꾸 짙어만 간다.
길을 걸어 내려오며 나뭇잎 생김새로 참나무를 구분하는 설명 판을 보았다. 지난번 왕실묘역구간을 걸으며 제대로 풀지 못했던 의문점들이 해소되었다.
도토리묵을 해먹는 상수리나무, 나무껍질이 굵은 굴참나무, 짚신바닥에 갈았던 신갈나무, 떡을 싸기도 했던 떡갈나무, 줄기를 갈아치우는 갈참나무, 열매가 가장 작은 졸참나무 이 모두 참나무의 잎 모양새로 구분되는 나무중의 진짜 라는 참 나무다.
큰 길과 만나는 곳까지 걸어 나오니 산행을 하고 내려오는 등산객들로 넓은 도로가 넘쳐난다. 쏟아져 내려오는 인파의 물살을 역류하며 오르막 길을 올라서니 길가에 절집이 맞아 선다. 광륜사라고 적혀있다. 산세가 워낙 수려하고 좋다보니 골마다 절집이 들어서있다.
훤히 들어다 보이는 절 마당에는 많은 사람들이 붐빈다. 지나온 능원사보다 규모도 작고 화려하지도 않지만 절간이 많은 참배객들로 붐빈다. 도시의 거대한 성전이나 사찰에 구름같이 모여든 신자들을 보면 대중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다.
지친 영혼들에게 안식을 주고 피안의 강을 건너는데 필요한 뗏목을 빌려주기도 하지만 가끔은 문명생활에 넋을 빼앗긴 우매한 대중을 상대로 혹세무민 하는 경우도 가끔은 있다.
광륜사를 뒤로하고 산길로 접어드니 다시 오르막 언덕길이 이어진다. 전에 있던 등산로를 둘레길로 사용하는데 나무계단은 많이 허물어지고 장맛비에 무너져 내린 절개지도 보인다. 힘들게 능선을 올라 내리막길에 들어서니 길가에 군 시설물들이 나타난다.
지하 벙커와 교통호 참호가 연이어 눈에 들어온다. 군 시설물이란 경고문이 붙어있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흔적이 역력하다. 내가 알고 있는 군사지식으로 생각건대 이곳은 지형적으로 수도 서울 방어선의 일부로 보인다.
이 시설물들을 만들 당시에는 감히 민간인들은 이곳에 접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민간 건축물들이 산 아래 까지 들어서고 시야를 가리는 고층건물들도 있어 전술적 중요성도 떨어지고 지금쯤은 전술개념도 바뀌어 점점 애물단지가 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 아래로 내려와 길가 슈퍼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사며 도봉산역으로 가는 길을 물으니 이곳은 의정부시라고 말한다.
( 201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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