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북한산 둘레길

차례로 나타나는 3봉 4봉 5봉(북한산둘레길:우이령길)

Sam1212 2011. 9. 27. 12:06

 

차례로 나타나는 3봉 4봉 5봉(북한산둘레길:우이령길)

 우이령을 걷기위해 '교현탐방센타'를 찾아가는 길은 큰길에서 북한산을 향해 군부대의 담장에 붙은 경고문을 읽으며 200m정도 걸어 들어가야 한다. 이 길이 개방되기 전에는 군 작전용으로만 사용되던 길이였고, 이곳은 많은 군 시설물들이 있어 곳곳에 '출입금지' '군사시설'이라는 경고성 계시물들이 눈에 많이 띈다.

 

탐방센터는 길 입구에 작은 초소로 직원2명이 나와 있다. 우이령은 길 북쪽과 남쪽 끝단에서 하루에 500명씩 사전 예약인원에 한해 탐방이 허용되는 구간이다. 우리는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였기에 간단한 신원 확인으로 입도入道 절차가 끝났다.

 

 

가드레일이 벗겨진 출입문을 통과해 우이령 길로 들어섰다. 길은 넓고 평탄한 도로다. 오랫동안 일반인들이 발길이 없던 지역이라 때 묻지 않은 환경이 입장객을 반긴다. 10분쯤 걸어들어 가니 벌써 코 속으로 시원한 솔 향이 전해져온다. 좌측으론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에서 벗어나있던 계곡의 자연스런 경관이 펼쳐진다.

 

자연은 손대지 않고 그대로 놔두면 스스로 알아서 자리를 잡아간다. 큰물이 나서 바위나 흙더미가 계곡으로 굴러들어오면 또 다른 물길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고 태풍에 나무가 부러지고 꺾이면 시간이 알아서 처리해준다. 보기 싫다고 축대를 쌓고 나무를 베어내고 모두 부질없는 짓이고 한마디로 자연에 역행하는 일이다. 좌측의 계곡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서 좀 어수선하고 매끄럽지 않아 보여도 자연스런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좀 특이한 모습은 길가에 우리의 소나무가 아닌 리기다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계곡 우측 산마루에 우둑 솟은 바위산 봉우리가 모습을 나타내더니 계곡의 상류를 향해 걸어갈수록 봉우리가 하나씩 늘어난다. 구간 중간에 마련된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처음 하나이던 봉우리가 다섯 개가 되었다. 이 다섯 개의 암봉岩峰이 서울 수유리 흰구름길 전망대에서 바라다보였던 도봉산의 유명한 '오봉'이다.

 

 

좌측에 우뚝 솟은 오봉을 바라보며 한 구비를 돌아가니 유격훈련장이 나온다. 꽤 넓은 운동장이 있고 계곡의 물길을 막아 만든 작은 저수지도 있다. 훈련장 옆에 세워진 군부대의 안내판에 써져있는 'PT체조' '얼차려'란 군대용어를 오랜만에 접하니 오래전 군 생활의 기억들

이 떠오른다. 군대를 다녀온 한국의 젊은이라면 유격장이 얼마나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을 만들어내는 곳인 줄을 잘 안다. 챙이 긴 빨간 모자를 눌러 쓴 조교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추어 터질 듯 악쓰는 구령 함께 땅바닥을 둥글고 활차에 매달려 외줄을 타고 계곡을 건너며 물속으로 뛰어내렸던 기억들이다.

 

 이 계곡의 골짜기 마다 설치된 훈련장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평생 지워지지 않는 뜨거운 기억들을 만들어가지고 돌아갔을 것이다. 유격장 돌탑 기단에 기대어 가지고온 간식을 먹으며 옆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나이 지긋한 두 남자의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땐 김신조가 넘어오는 바람에 36개월 했습니다." "논산 군번입니까?" "저 보다 좀 빠르네요!" 한국 남자들 에게 군대 생활의 추억은 죽을 때 까지 한국 남성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확실한 증거품이다.

 

 

 

유격장을 지나 조금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서니 길옆에 붉은색의 작은 '사방사업기념비'가 서있다. 비문의 설명을 읽어보고 지금까지의 몇 가지 의문이 쉽게 풀렸다. 길을 걸어오면서 보아왔던 리기다소나무 숲과 물오리나무들은 1960년대 양주군에서 사방사업沙防事業을 하면서 계획조림을 한 결과물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사방사업'이 무슨 말인지 용어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당시 우리나라의 산은 나무를 찾아보기 힘든 벌거숭이산이 대부분이었다. 요즘 우리가 TV화면에 나온 북한의 산에 나무가 없는 것을 보고 놀라듯이 당시 남한의 산들도 이와 다름없었다. 산에서 토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척박한 산에서도 잘 자라는 수종을 심었던 것이 지금 살아남아서 오늘 푸른 숲을 만드는데 밑거름역할을 한 것이다. 비문에는 당시 사용한 예산 인원 조림면적 등 사방사업 개요가 자세히 기록되어 우리 조림 역사의 한 단면을 증거하고 있다.

 

 

우이령이 소귀고개에서 유래되었음을 오늘 알았다. 그 동안 '우이동' '우이령'하고 무심히 말하고 들었던 고유명사가 소귀고개에서 나온 말이라 알고 나니 지금 넘어가고 있는 고개의 산 모습이 소귀를 닮아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고갯마루에 이르니 길 위에 위장막이 덮인 커다란 군인 초소가보이고 '안보체험관'이란 표지판이 붙어있어 다가가 들어가 보려 하니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있고 출입문이 폐쇄되어있다. 이쯤에서 탐방객들을 위해 안보 체험관 시설은 괜찮은 아이디어라 생각했는데 아직 준비가 덜되었는지 문제가 있어 폐쇄했는지 궁금하다.

 

고갯길 정상에 대전차 장애물 아랫길을 통과한다. 7,80년대 전방에서 군 생활을 한 남자들에게는 눈에 익숙한 풍경이다. 30대로보이는 여성 둘이서 길 양옆에 시멘트로 만든 정육면체의 구조물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며 나에게 설명해주길 바랜다. 사용 목적과 폭파요령까지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전차 장애물 설명 판에 '시대의 아픔'이란 글이 들어있다. 이 아픔은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의 아픔이다.

 

고개를 넘어 서울 우이동으로 내려오는 길은 조금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무릎이 아픈 나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는데도 무릎에 통증이 전달되어온다. 앞서가든 아내가 너무 천천히 걷는다고 투정을 부린다. 무릎 관절이 안 좋은 이들은 경사 길에서 오르막은 괜찮은데 내리막길은 딱 질색이다. 나는 뒷걸음으로 2,3백 미터를 걸어 내려왔다.

 

산길이 다 끝나기도 전에 숲 속의 아방궁들이 짙은 화장과 요염한 모습으로 호객행위를 하며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명산유곡名山幽谷 어디에서나 목격되는 모습이다. 간판은 하나 같이 붉은색 아니면 노란색이다. 한 업소에 2,3개의 대형 간판을 달고도 모자라 문 앞에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우리의 간판 문화는 중국 내륙의 소도시 상점들의 모습과 비교해도 수준이 떨어진다. 한마디로 미감美感이란 찾아보기 힘들고 천하고 유치한 수준이다. 나는 우리의 간판 문화만 바뀌어도 국격國格이 한 등급 정도는 올라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런 활동은 우리의 지자체 단체장들이 관심을 가지고 업주들을 설득하고 노력하면 충분한 가시적 효과를 가져 올 손쉬운 일들이다. 가까이 있는 쉬운 일들은 하지 않고 지자체마다 주민의 문화수준을 높인다며 엄청난 예산을 들여 문화회관을 신축하고 봄가을엔 천편일률적인 행사에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