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군 생활을 함께 했던 소대원들과 근무했던 부대를 찾아 후배 병사들을 위문하기로 했다. 전역한지 벌써 40년이 지났다. 우리가 근무했던 동경사 88여단은 부대 개편으로 22사단으로 바뀌었다. 옛 부대 족보를 추적해보니 55연대 1대대 소속이다. 현재 건봉산에서 경계 근무 중이라한다.
출발하는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전국 각지에 터전 잡고 생활하는 대원 14명이 이
번 행사에 동참했다. 멀리 경남 통영 진주 의령 봉화 그리고 군산 안동 청주 에서 각자 승용차 편으로 출발했다,
집결 장소는 강원도 인제 용대리에 12시 집합이다. 나는 서울 사는 고광동 대원과 9시 30분에 사가정역에서 합류해 고광동 대원이 운전하고 길을 나섰다. 고속도로에서 횡성에서 인터첸지를 모르고 지나쳐 속초를 경유 미시령을 넘어 용대리에 도착하고 보니 10분 지각했다.
날씨 탓인지 몇 명이 10~20분 늦었지만 모두들 빗 속에서 무사히 도착했다. 언제 만나도 정겨운 전우들이다. 작년 가을 모임에 보고 반년 만에 다시 만나는 자리다. 모두 뜨거운 악수와 포옹을 나누었다. 점심 식사는 이 지역 용대리의 별미인 황태정식으로 했다.
부대 방문 약속시간 오후2시, 용대리에서 진부령 고갯길을 넘으면 고성군 우리가 방문할 부대가 위치한다. 진부령을 넘어가며 시간이 조금 남아 도로변에 차를 주차하고 신록으로 물든 계곡을 바라보며 잠간 동안 휴식 시간을 가졌다.
나는 소대원들에게 시간을 거꾸로 40년을 돌려 당시의 직책으로 돌아가 대원들을 지휘해보기로 대원들의 의견을 구했다. 모두들 모처럼 청춘의 군시절로 다시 돌아가보는데 찬성했다. 군생활 당시 즐겨 불렀던 군가 '행군의 아침'을 시켜보았다. 가사를 잊은 대원들이 좀 있다. 모두가 다 아는 '진짜 사나이'로 허리 반동을 하며 진부령 계곡이 울리도록 합창을 했다. 기회가 되면 후배들에게 우리들이 나이는 들었지만 아직 패기는 살아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연대 본부에 도착하니 연대장과 연대 참모들이 나와 반겨준다. 40년 만에 옛 부대를 찾은 대원들과 함께 위문금 전달식을 가졌다. 부대서 제공한 방탄 헬멧을 쓰고 군복으로 갈아입고 부대가 제공한 군용 차량 6대에 분승하여 건봉산을 올랐다. 건봉산은 사단 지역 쎅타에서 해발 900미터가 넘는 가장 높은 고지다. 가는길에 만난 건봉사는 우리가 근무할 때 폐사지로 남아있었다. 지금은 재건해 화려한 모습으로 변해 있다. 건봉사를 뒤로하고 산을 오르는 가파른 군 작전도로는 포장은 되어 있었지만 경사가 심해 아찔한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나는 40년 전 군 근무시 건봉산의 특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소대원들과 함께 완전군장으로 산을 오른 적이 있다. 너무 힘이 들어 정상을 눈 앞에 두고 탈진 상태에 빠졌다. 전령이 구해온 전투식량 미숫가루를 먹고 기운을 차리고 산악 행군을 마친 기억이다. 또 한 번은 중대가 완전 군장 상태로 산악 행군을 하다 산 능선에서 텐트를 치고 숙영을 했다. 갑자기 눈이 내려 텐트위에 눈이 수북하게 쌓이고 추위가 몰려왔다. 작은 텐트 속에서 전령(이덕우/경기))과 함께 아침이 오기만 기다렸다. 전령이 건네주는 식사를 하는데 너무 추워서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내가 남긴 밥을 허겁지겁 전부 먹어 치우던 전령의 모습을 바라보던 기억도 있다.
건봉산 정상에 오르니 오전에 내린 비 때문에 산안개가 자욱하여 가시거리가 20미터 정도다. 건봉산 산줄기가 비무장지대에 만들어낸 고진동 계곡과 오소동 계곡은 넓고 깊다. 두 계곡은 군사 분계선을 마주하고 있는 경계부대에 중요한 지형이다. 이번 전방 방문의 개인적 욕심은 금강산을 바라보며 스케치를 해오는 일이다. 금강산의 장엄한 풍경은 건봉산 아래 까치봉에서 바라보는 맛이 최고다. 40년 전 우리 초소는 바로 까치봉에 있었다. 당시 여름 어느 날 소나기가 한차례 지나간 후 운해에 덮힌 금강산의 자태에 반해 스케치북에 몇 장의 모습을 남겼다. 전역 후에 그 스케치를 기초로 금강산 전경을 그려 집에 걸어두고 당시의 감동을 즐기고 있다.
안개 속에 같힌 건봉산 정상을 지나 2중대 막사를 찾아가는 길에 '노무현 벙커'라고 쓰여진 표지석을 보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건봉산 정상에서 군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으나 벙커 앞에 돌로 된 커다란 표지석이 세워진 줄은 몰랐다. 아무튼 1970년대 중반에 건봉산 고지에서 군 생활을 했다면 똑부러진 군 경력자임에 틀림없다.
대대장과 중대장의 인도 하에 2중대 막사에 도착했다. 준비해간 선물 박스들을 내려 놓았다. 모임 총무를 맡은 강필중(경남/진주) 대원이 멀리 안동에서 장을 봐 실고 온 신선한 수박과 과일들 그리고 봉화에서 사는 허광회(경북/봉화) 대원는 떡을 해서 들고 왔고, 아산에서 작은 식품 공장을 경영하는 변은섭(충남/아산) 대원은 중대 인원이 회식할 수 있는 떡국을 가지고 올라왔다.
중대 막사 건물을 둘러보니 40년 전 우리가 생활했던 지하 벙커와 비교할 수 없다.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진 막사다. 내무반에 모인 30여명의 후배 병사들이 우리를 맞아준다.
내가 위문단을 대표해서 간단한 인사말을 했다. "전역 40년 만에 소대원들과 함께 근무하던 2중대 후배 병사들의 앞에 서니 매우 기쁘다. 이 자리에 서있는 14명도 40년 전 여러분들과 똑 같이 이곳에서 경계 근무를 섰던 선배들이다. 당시는 근무 여건이 지금 보다 훨씬 열악했다. 여러분들은 자랑스러운 군인이다. 자부심을 가져라. 우리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쳤다는 사실은 죽을 때까지 따라간다. 더구나 이곳 최전방 철책부대 근무는 큰 자부심이다. 어떤 이는 군대 2년을 '썩는것'이라 말하는데 잘못된 생각이다. 지금의 군 생활은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인생의 큰 경험이다. 함께 근무하는 동료 선후배는 살아가면서 훌륭한 친구나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여기 서있는 선배 2소대원들은 군 생활시 부대 측정에서 항상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던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특히 화기분대는 사수 부사수가 3대를 이어지며 사회에 나와서도 전우애를 나누며 지내고 있다."
후배들 앞에서 40년 선배들의 팀파워를 보여 주었다. 이제 모두 흰머리에 주름진 얼굴 또는 대머리가 된 대원들이다. 내 구령에 맞춰 허리 반동을 하며 진짜사나이를 합창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나 나라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좁은 내무반에 선배들의 군가 소리가 힘차게 퍼졌다.
내무반 앞에 진열된 신형 장비와 군 보급품을 살펴보았다. 개인 보급품 뿐 아니라 신형 총기들이다. 그중에서도 야시경이 부착된 소총이 대원들의 눈을 끌었다.
우리 때에는 '스타라이트스코프'라는 미군이 월남전에서 사용했던 테니스채 가방만한 대형 장비가 있었다. 이 무거운 장비를 야간 근무 때마다 들고 나갔었다고 함께한 대대장에게 설명해줬다.
우리 2소대를 찾아가려했으나 다른 대대와 합동 근무 중이라 집합시키기 어렵다고 중대장이 전했다. 함께한 상사가 원하면 2소대 까지 안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비가 왔고 안개로 시야가 좁아 위험하다고 판단해 소대 방문은 취소했다. 사실은 이번 방문의 제일 큰 목적이었는데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러나 산을 내려가는 코스는 40년 전 우리가 근무했던 까치봉을 들러서 내려가기로 했다. 우리 군 생활 시에는 건봉산은 인접 대대 지역이고 까치봉 고황봉이 우리 대대 쎅터였다. 현재는 반대로 부대 배치가 되었다. 까치봉 우리 중대가 근무했던 막사에 잠시 들러보았다. 우리 때에는 능선 후 사면에 부대 막사가 있었는데 모두 능선 위에 현대식 막사로 바뀌어 있다.
까치봉을 내려와 마달리로 향하면서 옆에 승차한 대원들이 과거 추억을 회상한다. 마달리는 민통선 안의 마을이다. 고지서 경계근무 생활을하며 감시의 눈을 피해 민간인들과 몰래 접촉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접촉이란 한 마디로 술을 반입하는 일이다. 군에서 가장 통제하기 어려운 일이 술과 여자 문제로 발생하는 사건들이다. 당시에도 엄한 통제와 기율이 있었지만 술과 관련된 사건 사고들이 많았다. 우리 소대에서도 마달리 술 반입 관련 많은 일화를 가지고 있다.
가슴 부풀었던 건봉산 후배 병사들 방문을 조금은 아쉬움을 가지고 모두 마쳤다. 부대에서 제공한 숙소에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하면서 모두들 한마디 씩 한다. "소대장님, 그런데 연대장 대대장이 참 젊데예~, 중대장은 완전 애들 같네" "노사장, 젊기는 세월이 간 거다. 우리가 나이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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