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우이동 수유리 '순국선열묘역 순례길'과 4.19 국립묘지를 찾아보았다. 순례길은 아카데미하우스 앞에서 시작된다. 둘레길은 목재 펜스 가 설치되어 있고 펜스에 둘레길이란 로고가 붙어있어 펜스만 보고 따라가면 된다.
입구에 들어서 조금을 걸어가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준열사 묘역 김병로선생묘역 이시영선생묘역의 표지판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 순례길 주변에 독립유공자 13기의 묘소와 광복군 17인 합장묘소가 있다. 각 묘역들은 순례 길에서 100미터 200미터 쯤 떨어져있어 방문해 보든지 참배를 하려면 묘소 하나하나 언덕길을 걸어서 방문해야 한다.
순례길은 순국선열에 대한 추모의 공간이고 좀 더 나아가 스스로 죽음의 의미를 생각해보며 자기와의 대화를 나누는 길이다. 이준 열사 묘역에 죽음을 대하는 열사의 말씀이 동판에 새겨져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죽는다하며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을 산다하는가?"
오늘 이준 열사가 후배에게 내준 숙제를 풀어보면서 순례를 시작해본다.
성재 이시영 선생의 묘역을 찾아보았다. 이시형 선생의 육형제분들은 일제에 의한 망국의 한을 풀기위해 만주로 집단이주해서 모두 독립투쟁을 위해 일생을 바친 분들이다. 독립운동사 면에서 바라보면 우리나라 제일의 명문가이다. 이시영 선생의 묘는 높게 쌓은 2단의 축대위에 잘 가꾸어진 꽤 넓은 묘역이다. 묘지 앞엔 비석이 서있다. 나는 비석을 대할 때마다 항상 그 전문을 일독한다. 비문에는 그 사람이 세상에 나와 땅속에 들어갈 때까지의 행적이 잘 기록되어 있다.
이곳 순국선열 묘역에도 정치인을 포함한 13기의 묘역에 모두 비석이 서있다. 지금 까지 내가 읽어본 비문들엔 항상 최고의 찬사와 생전의 업적 찬양으로 가득 차있다. 사람이 살면서 실수도 있고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서 공과의 평가가 갈리는 행위도 있는 법이다. 죽은 사람이 자기 무덤을 만들 수 없고 묘비에 자신 업적을 써넣을 수 도 없다. 모든 건 다 뒤에 남은 사람들이 만들고 기록한 일이다. 정말 훌륭하게 사신 분들은 사후에 자신의 무덤과 비문에 집착하지 않을 분들이라고 생각을 해본다.
이시영 선생의 묘역아래 광복군 합동묘역이 있다. 광복군으로 중국에서 무장투쟁을 하다 순국한 17인의 영령을 모셔다 합장을 하였다고 비문에 적혀있다. 그리 크지 않은 봉분에 17인의 영혼이 잠들어있다. 누가 다녀갔는지 묘지 앞엔 시들어 누렇게 말라버린 꽃다발 하나가 덩그렇게 놓여있어 더욱 쓸쓸해 보인다. 나는 죽은 자의 무덤의 크기가 생전에 그의 권력의 크기에 비례하는 우리 장묘 관습에 불만이다. 죽은 자의 영혼의 무게가 차이가 있을 리 없고 무덤이 크고 화려하다해서 산자들의 추모의 정이 비례하지 도 않는다. 국립묘지에도 국가원수 장군 사병의 묘역이 구분되는 것은 이해되나 묘지의 크기에 차이가 없었으면 하는 바램 이다.
순국열사들의 묘소는 길에서 골짜기 능선 마다 순례길에서 2,3백 미터 씩 떨어져 있다. 모두 다 둘러보기엔 쉽지 않은 길이다. 심산 김창숙선생의 안내판이 보였다. 중학교시절 우연히 김창숙 선생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선생이 당한 고문 이야기를 읽고 당시 어린 마음으로 도저히 믿기지 않는 충격이었다. 나는 가끔 외부의 폭력이 나의 신념에 반하는 정신적 굴종을 강요하는 신체적 고문을 당하게 된다면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를 자문해본다. 솔직히 나는 김창숙 선생이 당한 그런 끔찍한 육체적 고문을 견뎌 낼 자신이 없다.
정신적 의지로 육체적 고통의 극한점을 통과하는 불굴의 정신력을 가진 분들이 유달리 우리 민족에게 많아 보인다. 이런 분들이 민족사의 수난기 마다 많은 범인들에게는 용기와 희망을 주고 역사의 흐름을 바른길로 바꾸는 초석 역할을 하였다.
순국선열 묘역 순례를 다 마치고 우이동의 4.19 국립묘지를 찾아보았다. 북한산에 올라 멀리 산 아래 우이동 골짜기에 내려다보이는 4.19묘지의 흰 탑들을 바라본 적은 있으나 직접 묘역에 들어와 보기는 처음이다.
1960년4월에 독재정권에 항거해 일어난 학생운동은 4.19학생의거로 불렸으나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4.19 혁명으로 명명되고 있다. '의거'냐 '혁명'이냐 하는 사전적 용어의 표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것은 정치사의 안목으로 보는 용어의 구분일 뿐이다. 나는 의거란 용어가 더 성스럽고 고귀한 느낌이 든다.
정권이란 권력의 배는 국민이란 바다에 떠있다. 온화하게만 보이던 물이 격노하여 배를 들어 올려 침몰시킨 사건이다. 4.19혁명은 우리 민족이 우리 손으로 근대적 민주국가를 세운 이후 민중의 힘이 국가 권력을 전복시킨 최초의 사건이다. 묘역의 중앙에 사월 학생혁명 기념탑 비문엔 이렇게 쓰여 있다.
"~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젊음은 순수함이다. 순수하다 함은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았다 함이다. 옳은걸 옳다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젊은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용기이고 특권이다. 희생자의 묘역을 돌아보았다. 묘석에는 당시의 사진이 들어가 있다. 나이어린 고등학생들과 여학생의 모습도 보인다.
묘역 우측으로 돌아가니 화강암으로 만든 3미터가 넘는 추모의 벽에는 4.19와 관련된 시詩들이 음각되어있다. 추모의 벽마다 새겨진 시는 우리에게 모두 잘 알려진 시인들의 작품이다. 그 중에서 유독 가슴을 아리게 하는 한 편의 시가 있었다.
빈 의자
그날 밤
너를 기다리던
저녁 밥상이
어머니 가슴에서
식지 않은 눈물이듯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책가방을 끼고
계단을 내려간
마지막 네 인사
오늘도 너는
빈 의자 위에
착한 그의 눈짓으로
돌아와 앉는다.
-鄭漢摸-
이 시를 읽어 내려가며 방금 전 묘역에서 보았던 고등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몇 분전 묘비에 새겨진 이름을 보고도 잊어버린 내 자신이 조금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정한모 시인의 '빈 의자'는 다른 시인들처럼 '혁명'이나 '피'와 같은 무겁고 어두운 시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애통해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그려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 '피에타'가 연상되었다.
순례길과 4.19묘역을 탐방하면서 국가와 민족 개인과 국가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4.19 묘역에서 10분 쯤 걸어서 내려가면 우이동 솔밭공원이 나온다.
벤치에 앉아 맥주 한 캔을 따면서 순례길 입구에서 이준 열사가 내준 삶과 죽음에 대한 숙제를 마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못하고 잘 죽으면 도리어 영생한다. 살고 죽음이 다 나에게 있나니 오르지 죽고 삶을 힘써 알지어다." (끝)
의로운 죽음을 찾아서(약속)
명절이 되면 많은이들이 고향 선산의 부모님과 조상 산소를 찾아 성묘를 한다. 후손의 한 사람으로 조상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의식이다. 이런 마음의 저변에는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국민의 한사람으로 살면서 한번쯤 방문해보아야 할 곳이 있다. 국립현충원이다. 동작동 현충원은 학교 때부터 여러 번 방문 했다. 대통령묘소 장군묘역 사병묘역 무명용사 추모관을 두루 참배하고나서도 무언가 빠트린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이는 동작동 현충원이 625전쟁 이후 국군묘지로 출발했기에 독립운동사에 나오는 많은 분들이 다른 곳에 안장되었기 때문이다. 이분들이 북한산 자락 수유리에 많이 모셔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수유리 묘역을 꼭 한번 찾아보겠다고 스스로 약속을 했으나 차일피일 수년이 흘렀다.
호국보훈의달을 맞아 수유리 '순국선열묘역 순례길'을 찾았다. 순례길은 아카데미하우스 앞에서 시작된다. 입구에 들어서 조금을 걸어가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준열사 묘역 김병로선생묘역 이시영선생묘역의 표지판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 순례길 주변에 독립유공자 13기의 묘소와 광복군 17인 합장묘소가 있다. 각 묘역들은 순례 길에서 100미터 200미터 쯤 떨어져있어 참배를 하려면 묘소 하나하나 언덕길을 걸어서 방문해야 한다.
순례 길은 순국선열에 대한 추모의 공간이고 좀 더 나아가 스스로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며 자기와의 대화를 나누는 길이다. 이준 열사 묘역에 죽음을 대하는 열사의 말씀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죽는다하며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을 산다하는가?“ 오늘 이준 열사가 후배에게 내준 숙제를 풀어보면서 순례를 시작해본다.
성재 이시영 선생의 묘역을 찾아보았다. 이시형 선생의 육형제분들은 일제에 의한 망국의 한을 풀기위해 만주로 집단이주해서 모두 독립투쟁을 위해 일생을 바친 분들이다. 독립운동사 면에서 바라보면 우리나라 제일의 명문가이다. 이시영 선생의 묘는 높게 쌓은 2단의 축대 위에 잘 가꾸어진 꽤 넓은 묘역이다. 묘지 앞엔 비석이 서있다. 나는 비석을 대할 때마다 항상 그 전문을 일독한다. 비문에는 그 사람이 세상에 나와 땅속에 들어갈 때까지의 행적이 잘 기록되어 있다. 이곳 순국선열 묘역에도 유명 정치인을 포함한 13기의 묘역에 모두 비석이 서있다. 지금 까지 내가 읽어본 비문들엔 항상 최고의 찬사와 생전의 업적 찬양으로 가득 차있다. 사람이 살면서 실수도 있고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서 공과의 평가가 갈리는 행위도 있는 법이다. 죽은 사람이 자기 무덤을 만들 수 없고 묘비에 자신 업적을 써넣을 수 없다. 모든 건 다 뒤에 남은 사람들이 만들고 기록한 일이다.
이시영 선생의 묘역아래 광복군 합동묘역이 있다. 광복군으로 중국에서 무장투쟁을 하다 순국한 17인의 영령을 모셔다 합장하였다고 비문에 적혀있다. 그리 크지 않은 봉분에 17인의 영혼이 잠들어있다. 누가 다녀갔는지 묘지 앞엔 시들어 누렇게 말라버린 꽃다발 하나가 덩그렇게 놓여있어 더욱 쓸쓸해 보인다. 나는 죽은 자의 무덤 크기가 생전에 그의 권력의 크기에 비례하는 우리 장묘 관습에 불만이다. 죽은 자의 영혼의 무게가 차이가 있을 리 없고 무덤이 크고 화려하다해서 산자들 추모의정이 비례하지 도 않는다. 국립묘지에도 장군과 사병의 묘역이 구분되는 것은 이해되나 묘지의 크기에 차이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순국열사들의 묘소는 골짜기 능선 마다 떨어져 있다. 모두 다 둘러보기엔 쉽지 않은 산길이다. 심산 김창숙선생의 안내판이 보였다. 중학교시절 우연히 김창숙 선생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선생이 당한 고문 이야기를 읽고 당시 어린 마음으로 도저히 믿기지 않는 충격이었다. 나는 가끔 외부의 폭력이 나의 신념에 반하는 정신적 굴종을 강요하는 신체적 고문을 당하게 된다면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를 자문해본다. 솔직히 나는 김창숙 선생이 당한 그런 끔찍한 육체적 고문을 견뎌 낼 자신이 없다. 정신적 의지로 육체적 고통의 극한점을 통과하는 불굴의 정신력을 가진 분들이 유달리 우리 민족에게 많아 보인다. 이런 분들이 민족사의 수난기 마다 많은 범인들에게는 용기와 희망을 주고 역사의 흐름을 바른길로 바꾸는 초석 역할을 하였다.
순국선열 묘역 순례를 다 마치고 우이동의 419 국립묘지를 찾아보았다. 북한산에 올라 멀리 산 아래 우이동 골짜기에 내려다보이는 419묘지의 흰 탑들을 바라본 적은 있으나 직접 묘역에 들어와 보기는 처음이다. 1960년 4월 독재정권에 항거해 일어난 학생운동은 419학생의거로 불렸으나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419 혁명으로 명명되고 있다. '의거'냐 '혁명'이냐 하는 사전적 용어의 표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것은 정치사의 안목으로 보는 용어의 구분일 뿐이다. 나에게는 의거란 용어가 훨씬 성스럽고 고귀한 느낌이 든다.
정권이란 권력의 배는 국민이란 바다에 떠있다. 온화하게만 보이던 물이 격노하면 배를 들어 올려 침몰시킬 수도 있다. 419혁명은 우리 민족이 우리 손으로 근대적 민주국가를 세운 이후 민중의 힘이 국가 권력을 전복시킨 최초의 사건이다. 묘역의 중앙 사월 학생혁명 기념탑 비문엔 이렇게 쓰여 있다.
"~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젊음은 순수함이다. 순수하다 함은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았다 함이다. 옳은걸 옳다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젊은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용기이고 특권이다. 희생자의 묘역을 돌아보았다. 묘석에는 당시의 사진이 들어가 있다. 나이어린 고등학생들과 여학생의 모습도 보인다. 묘역 우측으로 돌아가니 화강암으로 만든 3미터가 넘는 추모의 벽에는 419와 관련된 시詩들이 음각되어 있다. 추모의 벽마다 새겨진 시는 우리에게 모두 잘 알려진 시인들의 작품이다. 그 중에서 유독 가슴을 아리게 하는 한 편의 시가 있었다.
빈 의자
그날 밤/너를 기다리던/저녁 밥상이/어머니 가슴 속에서/언제까지나/식지 않은 눈물이듯/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책가방을 끼고/계단을 내려간/마지막 네 인사/ 오늘도 너는/빈 의자 위에/착한 그의 눈짓으로/돌아와 앉는다.-鄭漢摸-
정한모 시인의 '빈 의자'는 다른 시인들처럼 '혁명'이나 '피'와 같은 무겁고 어두운 시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애통해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그려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 '피에타'가 연상되었다.
순례길과 419묘역을 탐방하면서 국가와 민족 개인과 국가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419 묘역에서 10분 쯤 걸어서 내려가면 우이동 솔밭공원이 나온다. 벤치에 앉아 맥주 한 캔을 따 목을 축이면서 생각해 보았다. 현충원에서 수유리 순국선열의 묘소를 꼭 찾아보겠다는 약속을 지킨 뿌듯함과 오늘 순례길 입구에서 이준 열사가 내준 삶과 죽음에 대한 숙제를 마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못하고 잘 죽으면 도리어 영생한다. 살고 죽음이 다 나에게 있나니 오르지 죽고 삶을 힘써 알지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