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오늘의 생각

세월

Sam1212 2024. 6. 9. 14:25

세월

 

1994년 국군 포로 조창호 중위가 북한을 탈출해 43년 만에 귀대 신고를 하는 사진이 신문에 실렸었다. 탄광촌에서 43년간 강제노역으로 마르고 주름진 노인의 모습이었다. 노병이 군 정복으로 갈아입고 상관을 향해 거수경례를 하는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 세월이 만들어낸 감동의 기사를 읽으면서 1970년대 후반 전방 GOP 철책 부대에서 소대장으로 군 생활을 했던 추억들이 떠올랐다. 당시 20대 중반의 우리들은 몇명은 6.25 전쟁 중에 대부분 병사들은 전쟁 직후에 이 땅에 나온 젊은이들이었다.

당시 군 생활은 지금과 비교하면 조금은 힘들었다. GOP 부대는 주야간 경계근무가 주 임무이나 주간에는 크고 작은 작업이 많았다. 삽과 곡괭이를 가지고 통신선 매설작업 순찰로 공사 참호 공사 등을 하다보면 땅속에서 탄피와 어느 곳은 M1소총의 벌겋게 녹슨 실탄이 크립에 장전된채 무더기로 발견되기도 했다. 6.25 전쟁 당시 선배들의 참혹했던 전투 현장을 말해주는 증거다. 녹슨 탄피와 실탄을 바라보며 삶과 죽음의 경계선 전투 현장에 있었던 선배들을 생각하며 우리의 작은 어려움을 털어내는 위안을 삼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 세대가 훌쩍 지나갔다.  우리집 막내가 군에 입대를 하였다. 우연으로 내가 군생활했던 지역으로 배치받았다.군단 특공대에서 근무하다 유해발굴단에 차출되어 유해발굴병으로 활동했다.  내가 군장 메고 힘들게 오르내리고 참호공사 사 교통호 공사를 했던  바로 그 건봉산 지역에서1년 동안  6.25 전적지 유해 발굴 활동을 했다. 덕분에 아들 면회를 가서  내가 근무했던 부대 정문 앞에서 군복 입은 아들과 함께 사진 활영을 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지난달 충남 아산의 영인산 휴양림에서 소대 전우회 모임을 가졌다. 이번 모임은 번개모임이다. 3월에 경북 칠곡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대원들과 처음 참석하는 3명의 대원을 위해 아산에 거주하는 변섭 대원이 특별히 장소를 준비했다.

제일 먼저 전역한 장수 대원을 기준으로 계산해보니 48년 만의 만남이었다.

수 대원은 투병 생활을 오랫동안 했다는 소식을 다른 대원을 통해 전해들은 적이 있다. 첫 대면에 반가워 서로 껴안았으나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다행인 것은 암수술을 두 번이나 했는데 마르지 않고 의외로 건강한 노인의 모습을 보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익 대원도 이번 소대 전우회 모임에 첫 얼굴을 내보였다. 다른 모임과 경조사 자리에서 여러 번 만나 나하고는 친숙한 사이다. 그는 전방 GOP 근무시 상황병을 보면서 땅굴 탐지병으로 근무했었다. 상황병이란 24시간 작은 상황실에 앉아 외부와 전화와 무전 교신을 담당하며 초소의 일반 행정 업무도 담당한다. 주로 대학 재학 중에 입대한 전방 GOP부대의 많지 않은 병사들 중의 하나다. 상황병은 항상 초소장과 근접거리에서 근무하기에 업무상 많은 대화를 나누는 자리다. 익 대원에게는 특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6개월 주기 GOP경계근무를 마치고 후임 부대에 인수인계를 마치고 철수 준비를 할 때였다. 상급 부대에서 인사명이 내려왔다. 땅굴 탐지병은 철수 하지 말고 현지에 남아 탐지 업무를 계속 수행해야한다는 인사 명령이었다. 전 대원들이 군장을 메고 초소 앞 작은 운동장에 모여 출발 준비를 할 때 손익 상병이 나와서 함께 했던 전우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 대원들과 작별의 악수를 나눌 때 그의 눈에서 눈물이 그렁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서열이 확실한 한 집단에서 자기 위치를 가지고 생활 하다 다른 집단으로 옮겨 갈 때 그 불안한 마음은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는 이제 70이 된 나이에도 기업에서 CEO로 일하고 있다. 나는 이번 모임을 통보 받으며 1호선 전철 로 아산역에 내려 전화하면 변섭 대원이 픽업하기로 약속했으나 손익 사장을 만나 서울에서 아산까지 그의 고급 승용차로 동승해 왔다.

 

이번 모임에서 제일 기대되는 대원은 고대다. 그는 소대 상황병으로 소대장과 가장 오랫동안 생활 했던 대원이다. 같은 상황병이던 손 ㅇ 익의 사수이기도하다. 그가 제대 후에 고향에서 유치원을 경영한다는 소식을 변섭으로 부터 전해 들었다. 10여 년 전부터 소대 전우회에 참석하겠다고 연락이 왔었으나 참석은 한 번도 안했다. 이번 모임은 제일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도 집합시간 2시간이 넘도록 얼굴을 안보이고 있다. 섭 대원이 전화로 출발 여부를 수시로 체크하고 있으나 교회 임직을 맡아 하는 일이 많아 출발이 늦다 전한다.

 

대 대원은 GOP 근무 시 많은 역할을 했다.

그중 가장 큰 업적은 소대에서 주일 예배를 제안한 일이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일요일이면 소대 지하벙커에 전 대원들이 침상에 둘러앉아 예배를 드렸다. 예배의식 이라야 간단하다. 주기도문 외우고 찬송가 한 곡 부르고 성경  구절 읽어주고 고대가 대표로 기도하는 순이다. 전 대원을  모두 참석토록 강요하진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모든 대원들이 함께 했다당시 주로 불렀던 찬송가는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였다. 소대원들의 종교 성향 파악 당시 기독교로 신고한 병사가 몇몇 되지 않았고 타 종교로 신고한 대원들도 있었다. 전 대원들이 예배 시간에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소대장이 참석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모든 대원들 마음속에는 험난한 군 생활을 안전하게 마치고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잠재된 욕구가 충만해 있었다.

 

남자들의 집단에는 언제 어디서나 보이지 않는 법칙이 존재한다. 그것은 집단의 우두머리와 서열이다. 야생 동물의 세계 법칙과 동일하다. 초소에서 우두머리는 당연히 초소장인 소대장이다. 그리고 나머지 대원 33명도 1번부터 33번까지 서열이 정해져 있다. 당연히 그 서열의 기준은 계급과 직책 그리고 군번이다. 이 합법적인 서열을 지키기 위해  서열을 뛰어넘어 앞 순위로 가기 위해 끊임없는 투쟁이 벌어진다. 군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고가 이 법칙 운용 과정에서 발생한다.

 

논산 훈련소에서 기초 훈련을 마친 신병이 수백Km를 북으로 달려와 강원도 첩첩산중 산꼭대기 철책선 부대에 한 밤중에 도착한다. 선임병들이 실탄이 장전된 소총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절도 있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전입신고를 마치면 아무리 담대한 청년이라도 주변 분위기에 압도 된다. 긴장감과 약간의 공포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집단 내에서 자신의 서열이 가장 아랫 단계임을 자각한다. 선임병들은 신병들에게 이곳에서 군 생활을 안전하게 마치고 돌아가려면 서열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그들만의 방법으로 교육시킨다.

 

6,70년대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의 군대이야기 중에 공통으로 나오는 단어가 빳다라는 용어다. 알기 쉽게 설명하면 집단 내에서 서열을 유지하기 위해 또는 자신의 서열을 과시하기 위해 군기를 확립한다는 미명으로 아래병사에게 몽둥이를 사용해 엉덩이를 때려 체벌을 가하는 나쁜 관습이었다.

 

휴양림 숙소아래 영인산 산마루집에서 우렁쌈밥으로 술 한 잔 씩 돌리며 저녁 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우렁이 쌈밥이 식욕을 돋우었다. 산골 음식점이지만 모든 음식이 정갈하고 내 입맛에 맞았다. 특히 우렁 튀김요리는 처음 먹어보는 별미다.

기다리던 고대 대원이 저녁 식사를 마칠 때 까지 도착하지 않았다. 휴양림 숙소에 올라가 변섭 대원이 준비한 다과상에 둘러 앉아 젊은 시절 군대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모임이 있을 적마다 돌고 도는 무용담과 고생담이 나오지만 누구도 지겨워하지 않는다. 모두가 시간을 40여 년 전으로 돌려 청춘시절로 돌아간다. 주로 어느 병장의 빳다가 좀 심했다는 이야기 예비대 생활시 해안 철책 공사에 고생했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대 대원이 곧 도착한다는 전화 연락이 오면서 이번엔 우리 소대만의 특별한 이야기 소재가 등장했다. 포경수술 스토리다. 소대원 중에 포경인 대원이 여러 명 있었다. 상황병 이었던 고대가 소대장을 여러 번 설득해 대대 의무병을 소대 벙커로 불러 대원 4명이 포경수술을 받았었다. 대대 의무병은 GOP 초소를 순방하며 간단한 외상 치료를 해주거나 상비약을 지급해주는 병사다. 그가 어깨 넘어로 보고 배운 포경수술을 하고 비용 까지 챙겨가지고 갔다. 결국 내가 우려했던 사건이 터졌다. 종 대원이 수술한 부위가 뻘겋게 크게 부풀어 올라 근무도 못 나가고 10일 정도 엄청 고생한 후에 가까스로 사건을 마무리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수술을 받았던 4명 중에 주종과 손익 대원이 오늘 모임에 함께하며 고대 선임을 47년 만에 마주하게 된다.

 

나이든 남성들이 술이 거나하게 들어가면 으레 남성의 상징인 정력을 자랑하는 사람이 나온다. 이 분야에선 우리 대원들 중에서 주종 대원이 언제나 독보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옥천 출신으로 지금은 세종시에 살며 작은 사업을 한다. 그는 우리 대원들 중에 가장 많은 자식과 손자손녀를 두고 있다. 이번 모임에서도 70 노인이 4,50대의 방중술을 자랑하며 틈틈이 부인 자랑도 곁들인다. 언제나 다른 전우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어이 주사장 고대 도착하면 술 한 잔 따라주며 고맙다고  인사해, 그때 수술 덕을 많이 보았다고

 

대가 도착했다. 모두들 반겨 맞았다. 46년 만에 다시 보는 얼굴이다. 얼굴은 못 알아보겠다. 20대 팔팔하던 청년이 할아버지가 되어 돌아왔으니 당연하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목소리다. “소대장님이 잘 헤줬잔아유그의 느릿한 충청도 사투리와 음성은 20대와 거의 변함이 없었다. 사실 고대에게 지금 까지 얼굴을 안비친 것에 조금 섭섭한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많은 대원들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가까운 거리에서 소대원들과 초소의 안전과 발전을 위해 상의하고 노력했었기 때문이다. 다과상이 차려진 식탁 앞에서 내가 옛날로 돌아가 주문을 했다. “대 장로가 대표기도 한 번 하지요고장로가 식탁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 장로님이 되니 역시 젊었을 때보다 기도 내용이 훨씬 세련되고 풍성해졌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모두들 맘속으로 함께 했다.(끝)

 

 

세월

장병장 고병장 손상병이

할아버지가 되어 돌아왔다

청춘 시절 GOP 철책에서 맺은 인연

 

장병장은 2번의 암수술 극복했고

고병장는 큰 교회 장로님

손상병은 기업 현역 CEO

 

영인산 휴양림 전우회 모임

밤은 깊어가고

옛이야기 끊임없이 이어지고

고장로가 무릎 꿇고 대표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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