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겸재와 권율 장군의 발자국을 밟아보다.(궁산)

Sam1212 2008. 7. 7. 10:04

 

 

겸재와 권율 장군의 발자국을 밟아보다.(궁산)

선유도를 지나서 강서 지역으로 걸어가는 한강변 길은 조금은 무료하다. 강길 옆에 둔치가 없어 잘 가꾸어진 녹지대는 커녕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힘들다. 강안에 접한 수직의 시멘트 옹벽위에 걷기 길과 자전거 도로만이 휑하게 뚫려 있다. 그래도 이 길을 걷는 즐거움은 앞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이 시원하다는 점이다.

 

한강은 서울을 동서로 관통하는 커다란 바람 길이다. 바람은 한강을 따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불어온다. 강서지역은 서쪽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을 시원하게 정면으로 맞으며 걷을 수 있는 길이다.

 

이 길을 걷다보면 자전거 동호회원들의 신나는 질주 현장을 자주 마주치게 된다. 예쁜 유니폼과 헬멧으로 단장하고 은륜에 올라 신나게 페달을 밟고 질주해가는 자전거 동호회원들의 모습을 바라볼 때 마다 조금은 부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강변에서 자전거 타기는 정말 멋있어 보인다. 언젠가는 나도 한번 저렇게 신나게 질주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전거 동호인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썬그라스 아래 얼굴을 손수건으로 복면을 하였다. 요즘은 걷기 운동하는 분들 중에도 커다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걷는 분들을 자주 마주친다. 복면이란 자기얼굴을 외부에 내보이지 않기 위해 가리는 일인데 왜 수건이나 마스크로 복면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번은 날이 저물어 어두운데 챙이 큰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분이 갑자기 나타나서 섬뜩한 생각이 든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걸어가면서 나름대로 해답을 찾아보니 얼굴이 햇볕에 그을리지 않도록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여름에 장시간 걷는 경우는 햇볕에 노출된 얼굴 팔뚝 목이 그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들은 피부 관리에 온 신경을 쓰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다.

 

 한번은 쉼터에서 만난 자전거 타는 분에게 물어보았더니 작은 벌레들이 날아들어 얼굴에 부딛치는 것을 방지한다고 말해주었다. 수긍이 갔다. 밤길을 걷다보면 하루살이들이 귀와 코로 날아들어 고생한 기억이 여러 번 있다. 그러나 날씨가 흐린 날이나 야간에도 복면을 하는 사람들도 보면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남아있다.

 

선유도 공원에서 1킬로쯤 걸으면 안양천 과 한강이 합해지는 지점에 작은 다리를 건너가게 된다. 다리위에서 가까이 바라본 한강물은 생각만큼 깨끗하지가 않다. 어떤 때는 검은 색에 가깝다. 플라스틱 병이나 스트로폼 같은 생활 쓰레기도 떠다닌다. 여름철에는 팔뚝만한 잉어가 허연 배를 하늘로 향하고 떠있는 경우도 목격된다. 아직 우리 모두 한강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노력과 투자해야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는 증거이다.

 

 

가양대교를 지나서도 강변을 따라 곧게 뻗은 자전거 길과 걷기 길은 계속된다. 앞만 바라보고 걷기엔 지루한 길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구간에서 걷기를 즐기는 사람들은 많아 보이지 않는다.

 

 

강 건너 우측 난지도의 모습이 점점 뒤로 사라져갔을 때 올림픽대로 밑으로 뚫린 지하보도가 나타난다. 입구에 '가양나들목'이라 쓰여 있고 작은 쉼터도 마련되어있다. 이쯤에서 조금 쉬어가려고 벤치에 걸터앉으면 참아왔던 요의가 한꺼번에 강하게 몰려온다. 공중화장실이 있어야 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다. 적당한 곳을 찾아서 실례를 하려고 둘러보아도 몸을 감출만한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배낭을 다시 둘러메고 가양 나들목을 나가야한다. 나들목을 나와서 계단을 오르면 좌측에 동신 대아 아파트가 보이고 우측에 조그만 산이 눈에 들어온다. 화장실을 찾기 위해선 아파트 쪽으로 걸어가야 한다. 아파트 단지를 따라 제법 잘 가꾸어진 큰 공원이 만들어져있고 걷기운동을 즐기는 사람들도 제법 눈에 들어온다. 공원화장실에서 참았던 용무를 마치고 나서 공원을 한번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이곳이 '구암공원'이다. 지금은 아파트 주민들의 쉼터이고 산책 장소이지만 옛 그림에 나온 이곳의 모습을 보면 모래톱위에 버드나무와 소나무가 욱어진 나루터였다. 강물에 커다란 바위가 장승처럼 서있는데 바위에 구멍이 뚫려있어 '공암'이라 불렀다한다.

 

구암공원을 한 바퀴 둘러보았으면 맞은편에 보이는 작은 산에 꼭 올라가보아야 한다. 안내판은 없지만 건널목 차도를 건너서 길을 따라 앞에 보이는 산언덕을 오르면 된다.

이산이 궁산이다. 1980년대 올림픽대로를 건설하느라 많이 허물어져 나갔다. 산 아래서 자세히 보면 아직도 옛 상처를 발견할 수 있다.

 

 

궁산은 해발 75미터의 야산으로 조선시대 양천현의 주산이었다. 한강을 내려다보고 있어 삼국시대부터 오두산성 행주산성과 함께 적의 한강진입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한다. 궁산 아래 양지바른 언덕에 향교가 있고 그 아래에 현의 관아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 영조 때 겸재 정선이 65세에 이곳의 현감으로 부임하여 5년 동안 있으며 이 궁산에 올라 많은 그림을 그렸던 곳이다.

 

산길을 조금 오르면 '소악루'라는 정자가 나온다. 1737년에 동복 현감을 지낸 '이유'가 중국의 악양루를 모방해 지었다고 한다. 현재의 소악루는 옛날 그 자리 그 정자가 아니다. 없어진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새로 지은 것이다.

 

 정자에 오르면 올림픽 대로를 질주하는 차량들과 우측의 멋없는 아파트 숲으로 옛 정취를 찾아보기엔 너무 모자라지만 강 건너 마포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걷기운동을 하면서 큰 즐거움의 하나는 옛길을 걸으며 그 길을 먼저 걸었던 선인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일이다. 특히 역사에 기록된 사건이나 인물이 걸었던 길을 걸을 때이다. 수 세대의 시간을 건너뛰어 동일 공간을 답보하면서 당시 그들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사랑했던 일들에 대해서 후손으로 다시 한 번 그들의 생각을 읽어보는 일은 걷기운동 만이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이곳 궁산은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남쪽에서 병력을 이끌고 행주산성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머물다 간 곳이기 도하다. 아마 권율 장군도 분명히 이 산에 올라 동쪽의 한양 도성과 강 건너 행주산성을 바라보면서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왜군 격퇴를 위한 결의를 다졌을 것이다.

 

궁산 중턱에는 '양천고성터'의 유적지 안내판이 서있다. 옛 문헌에 성 길이가 218미터라고 소개되어있으나 방문객들이 옛 성곽 모습을 알아보기는 힘들고 정상에 오르면 약 1,000평 정도의 평지가 나온다. 정상 서쪽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울시 선정 우수조망명소'라는 안내문과 함께 조망대가 설치되어있다. 조망대엔 옛 정선그림과 함께 설명문도 잘 부착되어있다.

 

겸재 정선은 양천 현감으로 있으면서 이곳 궁산에서 바라본 풍광들을 그림으로 그려 남겼다. 자연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 감동을 그림으로 담아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를 진경산수화라 부른다. 그 이전에는 중국그림을 흉내 내거나 실재하지 않는 관념이나 이상의 세계를 주로 그렸다. 서양의 화가들이 붓과 캔버스를 들고 강과들로 나가기 시작한 때가 18세기 초부터이니 우리의 자연주의가 서양보다 1세기 앞선 셈이다.

 

특히 정선은 오랜 친구 이병연과 교류하면서 그가 그림을 그려 보내면 이병연은 그림에 맞추어 시를 지어주는 풍류를 즐겼다.

 

 

겸재는 이곳 산언덕에 올라 아침에는 동쪽 멀리 남산의 해 뜨는 모습을 그렸고 저녁 해질 무렵엔 강건너 갈마재의 봉화불 오르는 모습을 그렸다. 궁산 소나무 숲 위로 달 떠오르면 월광에 먹을 갈아 달밤의 정취를 담아냈고 깊은 밤엔 조용히 귀 기울여 한강의 물소리 까지 화폭에 담아내보였다.

 

정선과 이병연 한 사람이 그림을 그려 보내면 시를 지어 답례하기를 60여년 이렇게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다 두 사람 모두 천수를 누리고 시인은 81세 화가는 84세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역사에 이만한 풍류객을 찾아보기 힘들다.

 

270년이 지난 지금 궁산에 올라 정선이 바라보았던 서쪽 개화산의 절 모습을 찾아보고, 강 건너 난지도에 가려 보이지 않는 갈마재 만리재 애오개 노고산의 찾아보며, 멀리 남산을 바라보며 옛 모습과 비교해보는 것도 즐겁다.

 

산 아래 펼쳐진 등촌동 염창동 화곡동의 모습에서 빼곡하게 들어찬 아파트와 문명의 구조물들을 전부 시야에서 지워 버리고 지긋이 두 눈을 감아본다. 양천 현아 앞 넓은 들판엔 간밤에 내린 눈으로 온통 하얗게 덮여있다. 멀리 우장산 두 봉우리 아래 마을엔 아침햇살 가득한데 한 선비가 나귀를 타고 눈 위에 발자국을 또박또박 찍으며 마을을 향해 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궁산을 다 둘러본 뒤엔 산 아래 있는 양천 향교와 겸재 박물관을 꼭 들러보는 게 좋다. 양천 향교는 서울에 위치한 유일한 향교이다. 겸재 박물관은 2009년 4월에 개관 하였다. 겸재에 관한 많은 자료와 전시물들이 관람객들에게 알기 쉽게 해설과 더불어 최신 영상 자료로 설명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