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산성에 올라 승리의 함성을 들어본다.(행주산성)

Sam1212 2010. 3. 13. 08:30

산성에 올라 승리의 함성을 들어본다.(행주산성)

 

행주산성은 월드컵 공원에서 출발해서 걸어가는 것이 좋다. '한강시민공원 난지지구'란 이름으로 야영장과 주차장 운동장들이 있었던 지역을 2009년에 엄청난 예산을 들여 새로 단장하여 "난지 한강공원'이란 이름으로 화려하게 다시 태어났다. 모든 도로는 말끔히 포장되었고 요트 계류장, 자전거공원, 물놀이장과 같은 새로운 시설들도 많이 들어섰다.

 

 

 

 

새로 단장하기 전에 난지도에서 행주산성 가는 길은 지금같이 다듬어지지 않은 조금은 황량한 느낌이 드는 길이었다. 한강변을 따라 꽤 넓은 둔치엔 잡초가 욱어지고 강물이 느린 지역은 작은 모래톱도 구경할 수 있었던 한적한 곳이었다.

 

 

 

 

 

어느 한 곳은 개발이란 이름으로 손대지 않고 자연 그대로 남겨두는 공간도 필요하다. 잘 가꾸어진 공원보다는 좀 거칠고 황량하더라도 인공 구조물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야생의 초원길을 걸어가는 것이 훨씬 더 기분 좋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곳 행주산성 가는 길이 그런 길로 남기를 바랐었는데 이 곳 도 조경 원칙에 따라 잘 기획되고 다듬어진 공원으로 바뀌었다.

 

 

 

 

 

 

이 길은 저녁 무렵 걸어가야 가장 운치 있는 길이다. 저녁놀이 서쪽 산성 위를 붉게 태울 때 터벅터벅 혼자 걸어가며 생각의 끝자락을 찾아가다보면 분노와 미움 그리고 욕망과 자존심이란 이름으로 가슴 한구석에 쌓여있던 노폐물들이 말끔히 사라져버린다.

 

행주산성 찾아가던 초행길에 강변 길섶에 철퍼덕 앉아서 강 건너 개화산 위를 붉게 물들인 석양 아래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캔 맥주로 목을 축였던 그 때 기분이 너무 좋았었다.

 

우리는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새로운 계획과 목표를 가지고 각오를 다진다. 이때의 소망은 채움이다. 저녁노을 아래 걸어가면서 하는 묵상의 아름다운 주제는 비움이다. 붉게 물든 서쪽 하늘을 마주하고 천천히 가라앉는 태양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반추해보고 남겨진 시간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을 한번쯤 가져볼 필요가 있다. 행주산성 가는 길은 저녁노을 아래 걸어가며 묵상하기에 아주 좋은 길이다.

 

 

 

 

 

 

노을공원의 언덕이 끝나는 지점에 가양대교가 머리 위를 지나간다. 가양대교를 지나서 30분 정도를 더 걸어가면 한강을 가로 지르는 철교가 나온다. 이 곳 부터는 사람들이 부쩍 줄어들고 걷는 사람보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만이 이따금 마주친다. 이곳은 주거지와 멀리 떨어져있다. 공원 맨 끝 지역에 조성된 생태습지는 일부러 방문하는 사람 외엔 발걸음이 뜸한 지역이다. 생태습지를 한번 둘러보고 가는 게 좋다. 방문객도 많지 않아 한적한 곳이다. 가끔 젊은 연인들이 호젓한 곳에서 밀애를 즐기는 모습이 눈에 띠기도 한다.

 

 

 

 

한강공원이 끝나는 지점에 방화대교 너머로 행주산성이 보인다. 방화대교의 교각들이 머리위에 어지럽게 엉켜 지나가는 곳에서 서울시가 끝나고 경기도 고양시로 넘어 간다 . 이곳에서 길을 잘 찾아야 된다. 98년에 이곳을 통과해서 행주산성으로 넘어가려하다 길이 끊겨 고생한 경험이 있었다. 지금은 길이 연결되어있다. 교각 밑을 통과해서 일산으로 향하는 강변북로 우측 아랫길을 300미터 쯤 가다보면 행주산성으로 통하는 지하통로가 나온다. 지하통로를 넘어가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유원지에 들어왔다는 실감이 난다.

 

 

 

 

 

산성 아랫마을은 온통 XX가든 XX촌 X집이란 식당 간판들이 방문객을 유혹한다. 이 식당 마을 가운데로 산성 올라가는 길이 나있다. 200미터쯤 언덕길을 오르면 행주산성 주차장이 나온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하여 산성에 들어가면 된다.

 

행주산성의 행정구역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이다. 산성의 산은 덕양산으로 해발 124미터이다. 이곳은 옛날부터 한강의 군사적요충지였다. 작은 봉우리이나 서해에서 한강으로 들어오는 적선들을 감시하고 방어하기 좋은 지형이다. 한강에 면한 동쪽과 남쪽은 급경사이다. 옛 그림을 보면 방화대교가 지나가는 지점은 창능천이 흐르고 있어 산의 동쪽에서 바라보면 강과 내로 둘러싸인 섬 같은 모습이었다.

 

 

 

행주산성은 호국의 얼이 서린 전적지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크게 격퇴한 이곳 행주대첩 과 한산대첩 진주대첩을 3대첩이라 말한다. 이 작은 산자락에서 권율 장군은 2천3백의 병사로 3만 왜군을 격퇴시켰다.

 

 

성내에는 권율장군의 동상과 권율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장사, 행주대첩당시 우리 군이 사용했던 신기전 화차등 무기와 기록화를 전시한 대첩기념관, 지역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덕양정과 진강정, 산 정상의 새로 세운 행주대첩비등을 천천히 돌아보며 당시의 전투 상황을 한번 상상해본다.

 

당시의 전투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기 위해선 행주대첩비에 새겨진 비문을 한번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중략) 서울(한양) 수복을 목적으로2월11일 조방장 조경 승장 처영과함께 정병 2천3백을 거느리고 양천에서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들어와 토성을 쌓고 목책을 하고 있었다. 이때 서울에는 평안도 황해도로부터 후퇴한 왜병 3만 명이 집결하고 있었는데 12일 새벽에 왜장 '우끼다히데이'가 3만 대병을 총동원하여 행주산성을 포위하고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서로 교대해가면서 공격을 해왔으나 워낙 산성이 높고 가파르며 아군이 고지에서 활과 총통을 쏘고 돌을 던지기 때문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였다. (중략) 이 싸움은 2천3백의 작은 군대로서 3만의 적을 격퇴 하였을 뿐 아니라 적이 물러갈 때 시체 네 무더기를 쌓아 불사르고 갔는데 아군이 적의 시체를 주은 것이1백3십이요 기치와 창칼 얻은 것이 또한 많다하니 실로 큰 전과이며 이 싸움으로 인하여 아군과 명군의 사기가 일어나 차차 적을 남으로 쫒고 정부가 환도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그 의의는 실로 크다 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중략)

 

산성 서쪽 승군들의 방어지역에 수 천 명의 왜병들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궁수들이 일제히 시위를 당겼다. 앞에 오던 왜병 수 십 명이 고꾸라졌다. 왜병들도 조총에 일제히 불을 당겼다. 목책에 연해 창검으로 무장하고 방어선을 구축한 승군들이 쓰러져 나갔다.

 

오천여 명의 왜군 제2파가 다시 노도같이 밀려온다. 언덕 위 화차와 신기전에서 일제히 불을 품었다. 폭음소리 바람 가르는 휘파람소리와 함께 수백발의 화살들이 비 오듯 적진으로 날아간다. 언덕을 기어오르던 한 무리의 왜병들이 가을바람에 낙엽 딩굴 듯 쓰러져 내렸다. 주춤하던 왜병들은 시체를 타넘으며 다시 몰려온다.

 

불붙은 짚단을 목책위로 던져댄다. 목책에 불이 붙었다. 무너진 목책위로 왜병들이 타고 넘어온다. 토성에 연한 우측 방어선이 무너지고 있다. 창칼 부딪치는 쇳소리가 요란하다. 아군들이 뒤로 밀린다. 몇 사람이 등을 돌리고 산위 밀려올라온다.

 

 목책선이 뚫리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장군이 칼을 뽑았다. 등을 돌린 병사의 목을 베었다. 다시 창을 꼬나 잡은 아군들이 함성과 함께 목책 방어선으로 돌진한다. 산위에선 다시 한 번 요란한 폭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화살과 함께 바위와 돌덩이들 도 머리위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이 전투의 또 하나 큰 의미를 새겨본다면 요즘 용어로 '민군관'이 혼연 일체가 되어 총력전을 펼쳤다는 사실이다. 임진왜란은 나라가 백성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전쟁이었다. 나라를 지켜야할 왕은 도망가고 피난못간 백성들은 처참하게 유린당했다.

 

 많이 배우고 명석해 나라 일을 책임졌던 대신들은 전란 중에도 자기주장이 옳다고 편싸움을 했었다. 힘없는 백성들이 일어나 창칼을 잡았고 창칼이 없는 부녀자들은 돌을 나르고 왜병을 향해 집어던졌다.

 

행주산성의 행주치마 유래의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전쟁 이후에도 이 땅위에 몇 번의 전쟁이 더 있었고 그때마다 왕은 먼저 피난길에 올랐고 권력자들은 편을 갈랐으며 각자 매끈하고 화려한 논리로 자기주장을 펴기에 진력했었고 권력을 탐하기에 급급했다는 사실이다.

 

 

 

 

행주산성에서 역사체험을 끝마쳤으면 이곳 명물 매운탕 맛으로 먼 길을 걸어온 피곤을 풀어버리고 돌아가는 것도 좋은 추억 만들기이다. 산성 주차장에서 남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500미터쯤 걸어가면 행주나루에 도착한다. 이곳은 지나온 산성아래마을과 달리 민물고기 매운탕집들이 꽉 들어차있다.

 

행주산성 걷기일정을 마치고 시간이 있으면 걸어서 행주대교를 걸어서 건너 강서구의 습지생태공원까지 걸어가 보는 것도 좋은 코스이다.

 

산성에 올라 승리의 함성을 듣다

 

행주산성은 월드컵 공원에서 출발해서 한강변을 따라 걸어서 찾아가는 길이 좋다. 산성 가는 길은 2009년에 '난지 한강공원'이란 이름으로 화려하게 다시 태어났다. 모든 도로는 말끔히 포장되었고 요트 계류장, 자전거공원, 물놀이장과 같은 새로운 시설들도 많이 들어섰다.

새로 단장하기 전에 난지도에서 행주산성 가는 길은 지금같이 잘 다듬어지지 않은 조금은 황량한 느낌이 드는 길이었다. 한강변을 따라 꽤 넓은 둔치엔 잡초가 욱어지고 강물이 느린 지역은 작은  모래톱도 구경할 수 있었던 한적한 곳이었다. 개발이란 이름으로 잘 가꾸어진 공원보다는 좀 거칠고 황량하더라도 인공 구조물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야생의 초원길을 걸어가는 것이 훨씬 더 기분 좋을 때가 있다. 이 길은 저녁 무렵 걸어가야 운치 있는 길이다. 붉게 물든 서쪽 하늘을 마주하고 강 건너 계양산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는 태양을 바라보며 저녁노을 아래 걸어가며 묵상하기에 아주 좋은 길이다. 한강공원이 끝나는 지점에 방화대교 너머로 행주산성이 보인다. 방화대교의 교각들이 머리위에 어지럽게 엉켜 지나가는 곳에서 서울시가 끝나고 경기도 고양시로 넘어 간다교각 밑을 통과해서 일산으로 향하는 강변북로 우측 아랫길을 300미터 쯤 가다보면 행주산성으로 통하는 지하통로가 나온다. 지하통로를 넘어가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유원지에 들어왔다는 실감이 난다. 산성 아랫마을은 온통 XX가든 XXX집이란 식당 간판들이 방문객을 유혹한다. 이 식당 마을 가운데로 산성 올라가는 길이 나있다.

 

행주산성의 행정구역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이다. 산성의 산 이름은 덕양산으로 해발 124미터다. 이곳은 옛날부터 한강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강변에 연한 작은 봉우리이나 서해에서 한강으로 들어오는 적선들을 감시하고 방어하기 좋은 지형이다. 한강에 연한 동쪽과 남쪽은 급경사다. 조선시대의 옛 그림을 보면 방화대교가 지나가는 지점은 창능천이 흐르고 있어 산성 동쪽에서 바라보면 강과 내로 둘러싸인 섬 같은 모습이었다.

행주산성은 호국의 얼이 서린 전적지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크게 격퇴한 이곳 행주대첩과 한산대첩 진주대첩을 3대첩이라 말한다. 이 작은 산자락에서 권율 장군은 23백의 병사로 3만 왜군을 격퇴시켰다. 성내에는 권율장군의 동상과 권율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장사, 행주대첩 당시 우리 군이 사용했던 신기전 화차등 무기와 기록화를 전시한 대첩기념관, 지역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덕양정과 진강정 그리고 산 정상의 새로 세운 행주대첩비등을 천천히 돌아보며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 상황을 상상해본다. 당시 격렬했던 전투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기 위해 행주대첩비에 새겨진 비문을 읽어보면 큰 도움이 된다.

 

"서울(한양) 수복을 목적으로 211일 조방장 조경 승장 처영과 함께 정병 23백을 거느리고 양천에서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들어와 토성을 쌓고 목책을 설치하고 있었다. 이때 서울에는 평안도 황해도로부터 후퇴한 왜병 3만 명이 집결하고 있었다. 12일 새벽에 왜장 '우끼다히데이'3만 대병을 총동원하여 행주산성을 포위하고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서로 교대해가면서 공격을 해왔으나 워낙 산성이 높고 가파르며 아군이 고지에서 활과 총통을 쏘고 돌을 던지기 때문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였다. (중략) 이 싸움은 23백의 작은 군대로서 3만의 적을 격퇴 하였을 뿐 아니라 적이 물러갈 때 시체 네 무더기를 쌓아 불사르고 갔는데 아군이 적의 시체를 주은 것이 13십이요 기치와 창칼 얻은 것이 또한 많다하니 실로 큰 전과이며 이 싸움으로 인하여 아군과 명군의 사기가 일어나 차차 적을 남으로 쫒고 정부가 환도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그 의의는 실로 크다 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산성 위에 올라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내려다보며 눈을 지그시 감고 당시의 격렬했던 전투 상황을 그려본다. 산성 서쪽 승군들의 방어지역에 수 천 명의 왜병들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궁수들이 일제히 시위를 당겼다. 앞에 오던 왜병 수 십 명이 고꾸라졌다. 왜병들도 조총에 일제히 불을 댕긴다. 목책에 연해 창검으로 무장하고 방어선을 구축한 승군들이 쓰러져 나갔다.

오천여 명의 왜군 제2파가 다시 노도같이 밀려온다. 언덕 위 화차와 신기전에서 일제히 불을 품었다. 폭음소리 바람을 가르는 휘파람 소리와 함께 수백발의 화살들이 비 오듯 적진으로 날아간다. 언덕을 기어오르던 한 무리의 왜병들이 가을바람에 낙엽 떨어지듯 쓰러져 내렸다. 주춤하던 왜병들은 전열을 가다듬고 시체를 밟고 넘으며 다시 몰려온다. 불붙은 짚단을 목책위로 던져댄다. 목책에 불이 붙었다. 무너진 목책위로 왜병들이 타고 넘어온다. 토성에 연한 우측 방어선이 무너지고 있다. 창칼 부딪치는 쇳소리가 요란하다. 아군들이 주춤주춤 뒤로 밀린다. 몇 사람이 등을 돌리고 산위 밀려올라온다. 목책선이 뚫리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장군이 칼을 뽑아들었다. 등을 돌린 병사를 향해 칼을 들이대며 물러서지 말라며 고함을 친다. 다시 창을 꼬나 잡은 아군들이 함성과 함께 목책 방어선으로 돌진한다. 산 위에선 다시 한 번 요란한 폭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화살과 함께 바위와 돌덩이들도 머리 위로 사정없이 날아간다. 몇 차례 거친 파도처럼 밀려오던 왜병들이 결국 목책을 뚫지 못하고 퇴각하기 시작한다. 누가 먼저 함성을 질렀는지 모른다. 모두들 "! 이겼다" 승리의 함성이 산성 위에 울려 퍼진다. 흰옷 입고 돌멩이와 바위를 날라 오고 적들을 향해 집어 던졌던 아녀자들도 펄쩍펄쩍 뛰면서 병사들과 함께 승리의 함성을 지르고 있다. 환호성을 지르는 병사와 돌멩이와 물동이를 날랐던 백성들을 내려다보는 장군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산성 위에서 잠시 동안 눈을 감고 당시의 전투 상황을 그려보며 함성 소리에 놀라 눈을 뜬다. 먹먹해진 내 가슴을 통해 목구멍에 뜨거운 기운이 올라온다. 산성 아래를 흐르는 한강은 그날의 함성을 모두 들었을 텐데 아무 말 없이 서해를 향해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이 전투의 또 하나 큰 의미를 새겨본다면 요즘 용어로 '민군관'이 혼연 일체가 되어 총력전을 펼쳤다는 사실이다. 임진왜란은 나라가 백성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전쟁이었다. 나라를 지켜야할 왕은 피난을 가고 피난 못 간 백성들은 적들에게 처참하게 유린당했다. 많이 배우고 명석해 나라 일을 책임졌던 대신들은 전란 중에도 자기주장이 옳다고 편을 가르고 싸움을 했다. 힘없는 백성들이 일어나 창칼을 잡았고 창칼이 없는 부녀자들은 돌을 나르고 왜병을 향해 집어 던졌다. 부녀자들이 앞치마에 투석전에 쓸 돌을 날라 왔다 해서 행주치마의 유래가 되었다. 행주산성의 행주치마 유래의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힘없는 아녀자들까지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일심동체가 되어 전투에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산성 위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면 동쪽 새로 생긴 마곡대교가 강을 건넌 지점에 작은 산이 보인다. 이 산이 궁산이다.  이곳 궁산은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남쪽에서 병력을 이끌고 행주산성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머물렀던 장소다. 아마 권율 장군도 분명히 이 산에 올라 강 건너 동쪽의 한양 도성과 서쪽의 행주산성을 바라보면서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왜군 격퇴를 위한 결의를 다졌을 것이다. 행주산성 답사를 다 마쳤으면 시간을 내어 강 건너 궁산에도 한번 올라 권율 장군의 발자취를 찾아보고 궁산 위에서 행주산성을 바라보는 느낌도 괜찮다.

 

옛길을 걸으며 맛보는 즐거움은 그 길을 먼저 걸었던 선인들과 만나고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일이다. 특히 역사에 기록된 사건이나 인물이 걸었던 길을 걸을 때면 그들과 만나는 기쁨에 가슴 설렌다. 수 세대의 시간을 건너뛰어 동일 공간을 답보하면서 당시 그들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사랑했던 일들을 후손의 한사람으로 다시 한 번 그들의 생각을 읽어보는 일은 걷기 답사만이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