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서민 주거생활사의 현장.(낙산공원)

Sam1212 2010. 4. 24. 10:52

서민 주거생활사의 현장.(낙산공원)

 

북악 능선을 따라 내려오던 성곽은 혜화동에서 끊어지고 낙산에 올라가서야 다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혜화역에서 내려 마로니에 광장으로 들어갔다. 공원 안은 언제나 젊은이들로 활기에 넘친다.  벤치에 앉아 잠시봄볕에 취해 쉬고 있을 때 옆에 앉은 젊은 부부에게 한 젊은이가 다가와 연극 티켓을 들고 열심히 호객행위를 해댄다.

 

 옛 서울대학교 본관 자리이던 이곳이 공원이 되면서 가장 활발한 문화 활동이 이루어지는 분야는 연극이다. 공원 주변을 둘러보면 눈에 띠는 간판은 소극장과 식당이 대부분이다. 나는 많은 예술 분야 중에서 연극은 정말로 어둡다. 좀 친해지려고 오페라와 연극 공연을 여러 번 관람한 적이 있으나,  결국 연극을 가까운 친구로 만들지는 못했다.

 

낙산을 오르기 위해 공원 뒤 골목으로 나왔다. 우리 속담에 길 닦아 놓으면 무엇이 먼저 지나가고 상 차려 놓으면 무엇이 먼저 덤벼든다는 말이 있다. 이곳 대학로의 크고 작은 빌딩들은 문화 예술 관련 시설 보다는 요식업소들이 대부분 점령했다.

 

그래도 오늘은 그 많은 식당 간판 사이로 '쇳대 박물관'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식당들의 거친 공세에 굴하지 않고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얼마 전 우의동 순례 길에서 보았던 활엽수림 가운데 홀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서있던 청정한 노송 한 그루가 연상되었다.

 

'쇳대'는 충청 경상지역에서 쓰는 열쇠의 방언이다. 박물관 2층에 올라가 보니 마침 토기류를 전시 중이다. 전시장엔 관람객이 한 사람도 없다. 2층을 다 둘러보고 3층의 쇳대 박물관에 올라가니 그곳에도 내가 유일한 방문객이다. 전시관에는 한국의 전통적인 여러 가지 쇳대뿐 아니라 장석과 목가구도 전시되어 있다.

 

나는 박물관에 들어가면 언제나 흥미진진하고 즐겁다. 지방의 중소 도시에 가서도 박물관이 있는지 알아보고 시간을 내어 꼭 들려보곤 한다. 특히 사라져가는 우리의 옛 물건들을 수집한 상설 전시관을 대할 때마다 컬렉터의 노고에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컬렉션은 부자들의 호사가의 명예욕이나 낭만적인 소유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히 잊혀져가는 생활용품이나 민속품의 컬렉션은 부의 축적과는 더욱 거리가 멀다. 컬렉션은 우선 그것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지식과 탐구정신 끈질김과 집요함이 동반된 결과다.

 

우리나라에는 오세창 전형필 손재형 이병철 이회림 윤장섭 송성문같은 분들처럼 잘 알려진 유명한 컬렉터도 많지만 지방의 소도시에도 우리의 생활문화에 관련 유물의 수집과 보전에 일생을 헌신하는 분들을 많이 보아왔다. 이들은 모두 우리 문화와 예술의 지킴이이며 진정한 멋을 아는 분들이다.

 

낙산으로 올라가는 골목길은 이렇다 할 안내판도 없이 서울의 여느 산동네에서 볼 수 있는 골목길과 다름없다. 그래도 눈여겨보면 다름을 발견할 수 있다. 명색이 문화 예술의 동네이다 보니 시멘트 담장이나 한쪽이 헐려나간 벽에 설치미술이나 벽화 장식들이 간혹 눈에 들어온다. 오늘은 전에 보이지 않던 철판을 활용한 설치미술품이 눈에 들어왔다.

 

언덕길을 조금 오르다보면 바로 공원 입구가 나온다. 나는 1980년대 초에 직장 생활을 하면서 승용차 옆자리에 타고 이 언덕길을 몇번 올라왔던 기억이 있다. 당시 이 낙산 마루까지 집들이 들어차 있었다. 올라가는 길이 어찌나 가파르던지 차가 뒤로 미끄러지면 어쩌나하고 가슴 졸였던 기억이다.

 

낙산공원 입구엔 커다란 화강암 벽에 용 문양이 새겨져 있다. 조선왕조가 한양을 도성으로 정하며 풍수지리에서 일컫는 좌 청용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계단을 올라서면 작은 광장이 나오며 안쪽에 낙산 전시관이 있다.

 

전시관에 들어가 보니 낙산의 옛 모습에서 지금의 공원이 들어서기까지 역사적인 변천 모습을 사진자료와 함께 잘 설명해 놓았다. 낙산의 역사성 복원을 위해 1996년에 낙산근린공원으로 지정하고 시민아파트 30동과 단독주택176채를 철거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낙산의 원래 옛 이름은 낙타의 모습을 하고 있다하여 駱駝山이었다 한다. 낙산은 창덕궁과 가까이 있어 조정의 고관들이 산 아래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며 동네를 이루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빈민층들이 움막이나 토막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토막촌'이라 불리는 빈민촌이 형성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판자촌이 형성되었으며 달동네라 불리던 판자촌이 개발시대를 거치면서 서민아파트촌으로 변모하였다. 지금은 서민 아파트와 달동네 주택들이 모두 철거되고 공원이 되었으니 이곳은 가히 한민족 서민 주거생활사의 역사적 시대별 전형을 보여주던 곳이다.

 

 

 

오늘따라 하늘엔 황사도 다 거치고 나들이 나온 시민들로 꽤 북적인다. 공원은 벚꽃이 만개하였고 철죽과 영산홍도 막 피어나고 있다. 낙산의 정상에서서 바라다보는 서울시내의 전망이 절경이다.

 

서쪽을 바라다보면 멀리 우백호 인왕산 줄기가 하늘에 맞닿아 있고 주산인 백악 봉우리가 늠름하게 우뚝 버티고 서있다. 북악에서 낙산으로 뻗어 내린 좌축은 비원과 창덕궁의 수림대 도심 깊숙이까지 길게 펼쳐있어 잡스런 인공 구조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곳 낙산에 올라서야 볼 수 있는 풍광이다. 오늘은 비원 숲의 막 피어오르는 연록의 푸르름과 만개한 벚꽃 살구꽃의 연분홍이 한데 어울려 환상적인 컬러를 연출하고 있다.

 

 

 

낙산 성곽에 기대어서서 성벽 넘어 북쪽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면 역시 한 폭의 동양화를 감상하는 기분이 든다. 낙산에서 뻗어나간 성벽은 숲을 감아 돌아 꼬리를 감춘다. 북악에서 우측으로 흘러내린 좌측 능선은 성북동의 주택단지 위로 지나가고 더 멀리 공제선엔 북한산의 웅장한 자태가 하늘에 닿아 있다.

 

낙산에서 서울시내 조망을 마치고 성곽 밖으로 나와 동대문 방향으로 성벽 아래로 난 산책로를 따라간다. 이곳에서 성벽을 잘 살펴보면 성벽의 축조 년대가 잘 들어낸다. 돌의 색과 형태가 한 구간에서 확연히 차이가 나는 곳이 있다.

 

 검게 퇴색된 돌일수록 초기에 쌓은 것이고 밝을 수 록 후에 보수한 석재이다. 메주덩어리처럼 작은 것은 태조 때 축성한 돌이고 장방형의 큰 돌은 숙종 때 보수한 돌이다.

 

성벽을 우측에 두고 산책로를 내려오다 좌측으로 눈길을 돌리면 산 마루 까지 집들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산동네다. 그러나 조금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 동네 전체가 하나의 미학적 구성을 이룬 작품처럼 보인다. 단층집 이층집 5층짜리 빌라 하나하나의 건물들이 차곡차곡 쌓여 산을 이루어 하늘과 닿았다. 수많은 직사각형 정사각형 정삼각형 이등변삼각형들이 수직선 수평선과 아주 정교하게 배합을 이루고 있다. 건물들은 주로 80년대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시대별 주택양식의 백화점이다. 내가 돌아본 곳 중에서 이곳만큼 주택양식이 잘 보존된 곳도 없다. 이곳을 서울시 근대 주거 문화유산으로 지정하면 좋다는 생각도 든다.

 

 

 

 이 동네가 도시 재개발이란 명목으로 철거되고 낙산을 가리는 괴물 같은 철벽 아파트로 바뀌면 어쩌나 하는 걱정 아닌 걱정도 혼자 해본다.

 

성벽을 따라난 산책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다 보면 성벽 넘어 로 건너가는 작은 통문이 나온다. 지난번 걷기에선 동대문 까지 걸어 내려갔었다. 오늘은 다른 방향으로 걸어보려고 성벽에 난 문을 넘어서니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전형적인 산동네 마을이다. 7.80년대 서울의 외곽 동네에서 볼 수 있었던 산동네가 아직 이곳에 살아서 숨 쉬고 있다. 사람 둘이서 간신이 지나갈만한 시멘트 계단의 가파른 언덕길, 전선줄이 어지럽게 얽힌 전신주, 처마가 맞닿은 낡은 주택들, 골목길을 향해 뚫린 작은 창문들엔 녹이 벌겋게 슨 방범 창문틀. 동네 이름을 알아보려고 문패를 찾아보았으나 어느 한 집 문패가 없다.

 

처마 밑에 달려있는 전기 계량기에도 하나같이 '동이름' 없이 검은 글씨로 번지수만 적혀있다. 모처럼 이곳 골목길을 내려오면서 도시 생활의 향수를 맛보았다.

 

 

 

골목길이 다 끝나는 지점에 제법 큰 저택이 나왔다. 담장 안엔 커다란 백송이 한 그루 서있다. 저택의 대문 앞에 서니  '이화장'이라 안내판이 서있다. 하마터면 지나칠 뻔했다. 낙산에 오르기 전에 안내도에서 이화장을 보았으나 이곳에서 이화장과 맞닥뜨릴 줄은 몰랐다.

 

이화장의 주소는 종로구 이화동 1번지였다. 그러면 방금 전에 내려온 그 골목길 주소도 이화동이다. 배꽃마을 아름다운 이름이다. 배꽃은 조선왕조의 상징이기도하다.

이화장에 들어서니 초등학교 학생들이 견학을 나왔는지 사진 찍고 그림 그리고 수첩에 기록하고 넓은 뜰 안이 활기에 넘친다.

 

이화장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1947년 10월 18일부터 사저로 사용했던 저택이다. 지금은 고인의 유품들을 보관하고 전시하는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초대 내각이 이곳에서 조직되었다. 이화장은 안채 별채 사랑채 조각당 4동의 한옥과 살림집 1동으로 낙산 언덕 아래 띄엄띄엄 배치되었다.

 

이곳에 들어와 보니 서민 촌이 들어서기 전 조선시대 낙산의 옛 동네모습이 머릿속에 자연스레 그려졌다. 울창한 노송 숲 사이로 이끼 낀 바위들 그 사이를 흐르는 맑은 물은 동네 앞에 이르러서 작은 개울을 이룬다. 개울 건너엔 임금이 사시는 창덕궁의 높은 전각들이 숲 사이로 보이고 궁궐 담장 넘어 기와집과 초가집 지붕들은 남산 아래까지 이어져 있다. 눈길이 끝나는 지점엔 남산 두 봉우리가 하늘에 닿아있다.

 

내가 그려본 조선시대의 낙산 모습은 이승만 대통령이 이화장에 처음 들어와 지었다는 漢詩를 유품 전시관에서보고서야 내 상상력이 크게 빗나가지 않았음을 보고 마음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화장에 이사와서

 

동대문 북쪽 낙산 앞에

이화동 옛 골짝에 새로 집터 정하오니

보신각 종소리는 잔비 속에 들려오고

終南山 종소리는 구름가에 보인다네

아이는 눈을 쓸어 소나무 밑 길 트이고

아낙네 어름깨어 바위사이 물 긷는다

집안이 작다한들 어찌 마달손가

숲과 계곡에는 風煙이 가득하다.

 1947년 겨울 이승만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도 그의 정치적 공과가 엇갈리는 분 중의 하나이다. 오늘날 그의 평가 중에서 가장 어두운 부분은 일제 청산을 완벽하게하지 않고 친일 인물들을 요직에 기용했다는 비판이다.

 청년시절부터 일제의 침략에 맛서 오랜 투쟁 활동을 벌였던 그가 왜  친일 인물들을 좀더 과감하게 못했을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답은 간명하다. 정치란 용어에는 권력의지가 내재되어있기 때문이다.

 

전시 유품 중에서 이승만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김구 이상재 손병희 안창호 이동영 이동휘등과 주고받은 친필 서신들이 전시되어 있다. 해외동포에게 대일 항전을 촉구하는 방송 연설문도 눈에 들어왔다. 그가 이 글을 쓸 당시의 마음과 해방 이후 마음의 변화가 있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모든 것은 정치권력이 만들어내는 조화 때문이다. 정치의 추동력은 권력에 대한 욕구이다. 강직한 선비는 정치가가될 수 없다. 그가 비록 정치에 입문하여도 성공한 정치인이 되지 못한고 실패한 정치인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그는 강렬한 권력욕이 없기 때문이다.

 

 수유리 순국선열 순례길에서 만난 心山 金昌淑 선생은 강직한 선비였다. 선비는 義士나 志士가되어 이름을 남기고 정치가는  英雄이나 독재자되어 이름을 남긴다. 의사이며 영웅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사람들의 욕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