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백악마루에 올라 서울을 바라본다(북악산)

Sam1212 2010. 3. 21. 09:03

백악마루에 올라 서울을 바라본다(북악산)

경복궁역에서 내려 1번 출입구로 나와 자하문이 있는 청운동쪽으로 올라가는 길은 항상 등산복차림의 산행객들로 붐빈다. 북한산 산행코스 중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걷기에는 반대편 2번 출구로 나와 올라가는 게 훨씬 편하다.

 

 이 동네에 들어서면 좀 독특한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건너편 청와대 때문이다. 걸어가다 보면 두 명 씩 짝지어 순찰하는 전경들과 여러 번 마주치기 도 한다. 서울의 다른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삐죽 삐쭉 솟아난 고층 건물들은 보이지 않고 주변의 상가나 주택들도 잘 정비되어있다. 어떻게 보면 80년대에서 시간이 멈추어 선 느낌이 들기도 하고 안정감 있는 조용한 주택가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효자동이니 옥인동이니 하는 옛날 동네이름도 왠지 조금은 정겨운 느낌이 든다.

 

서울이 지금처럼 대도시로 바뀌기 전의 인왕산 밑의 나지막한 기와집 들 만으로 들어찼을 땐 지금보단 꽤 넓은 동네로 보였을 것이다. 걸어가다 보면 효자동 시장이 나온다. 이곳에 잠깐 들러 간단한 먹을거리를 사가지고 산에 오르는 것도 괜찮다. 재래시장 입구에 맛있는 떡집과 과일가계가 있다. 조금 더 걸어가다 보면 길 건너편에 청와대로 들어가는 길이 보이고 전경차량들이 죽 늘어서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복을 한 경찰들이 많이 몰려있는 장소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다.

 

길 안내판에 우당기념관 표시판이 붙어있다. 길을 걸어가다 보면 도로표지판에 갈색 글씨로 쓴 곳은 꼭 방문해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문화에 관련된 장소이기 때문이다. 좌측 길로 400미터쯤 걸어들어 가면 우당 이회형 선생의 기념관이 있다.

 

일제에 나라가 패망하자 이회영 선생의 형제분들(건영 석영 철영 시영 호영)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사재를 모두 독립운동 자금을 조성하는데 바쳤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투사들을 배출하였으며 다물단이란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하기도하고 임시정부에서 큰 활약을 하신 분들이다.

 

이 골목길에는 서울 맹아 학교와 서울 농아 학교가 있다. 서울 장애인 교육의 총본산인 셈이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배려 수준에 따라 선진국인지 후진국인지 나라의 등급이 정해진다. 우리도 최근 장애인에 대한 제도적 지원과 사회 인프라가 많이 개선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 선진국 수준에 이르기엔 갈 길이 멀다.

 

 서울 맹아학교의 담에는 학생들이 핸드프린팅 타일로 벽화가 장식되어있다. 천천히 읽어보면 가슴에 와 닿는 아름다운 글이 너무나 많다.

 

'대한민국 대표 안마사가 될 테야!' 고등3 박한별

'눈이 보여서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고 싶어요.' 고등3 조문성

'목화토금수 오행 속에 성실히 살련다.' 김승훈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유해리

'대통령님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해 힘써주세요.' 중1 송재선

 

글 하나 하나 마다 어린 학생들의 애틋한 소망과 꿈이 담겨 있기도 하고 두 눈 뜨고도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우리사회의 어른들에 대해서 일침을 가하는 날카로움이 번득이는 말들도 보였다.

 

바로 옆 서울 농아학교의 담장에도 학생들이 그린 그림으로 만든 타일로 담 장식이 되어 있다. 그림 하나하나에 순수함과 천진함이 묻어난다. 학생들의 그림에는 기교가 없고 마음으로 바라본 그 들의 세상이 작은 그림 속에 들어와 있다. 두 학교 학생들의 타일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보람을 채우고도 남는다.

 

500미터쯤 더 걸어가면 청운동이다. 버스길을 따라 창의문으로 가면 돌아가는 길이다. 경기상고 앞길을 따라 빌라촌으로 들어가면 지름길이 나온다.

 

고등학교 시절 서울의 여러 학교를 거치신 선생님께서 경기상업고등학교가 서울에서 가장 좋은 캠퍼스라는 말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밖에서 쳐다보아도 북악산의 수려한 산자락 밑에 잘 자리 잡은 교정이다.

 

서울의 오래된 명문 고등학교들이 강남으로 이전하여 고색창연한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빌라촌에는 안내판이 없다. 언덕길을 올라 끝에 다다르면 큰 길로 오르는 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다 오르면 큰길이 나오고 바로 앞에 1.21 사태 때 순직한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이 서있다. 바로 앞에 창의문 쉼터가 있다. 언덕을 올라 성곽탐방 안내소에서 간단한 출입신청서를 쓰고 신분증을 제시하면 출입패찰을 받는다. 창의문을 건너 좌측으로 인왕산 성곽길이 이어지고 우측 언덕을 오르기면 북악산이다

.

 

북악산 성곽걷기가 시작된다. 북악산을 통상 청와대 뒷산이라 부른다. 지난 40년 동안 가까이 있어 바라볼 수는 있어도 올라가볼 수 없었던 금단의 땅 이었다. 늦었지만 북악산 성곽길의 개방은 서울의 아름다움을 시민들 스스로 발견하고 확인해보는 거울과 같은 존재이다.

 

아무리 예쁘고 아름답게 치장한 색시도 거울이 없으면 자신의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없다. 북악산의 성곽 길은 서울의 아름다움을 확인해볼수 있는 거울과 같은 존재이다. 서울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즐기고 감상하고 감탄하며 서울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오랫동안 박탈했었다.

 

창의문에서 백악마루로 올라가는 성곽 길은 무척 가파르다. 성벽을 따라 나무로 만든 계단 길이 잘 만들어져 있지만 한두 번 정도는 쉬었다 올라가야한다.

 

80년대 광화문에서 성북구 방면을 빨리 넘어 가기위해서 북악스카이웨이 를 자주 이용하곤 했었다. 당시엔 북악 스카이웨이에서 차량이 고장이라도 나서 멈추면 인접한 초소의 군인들이 즉시 달려 나와 위험인물로 몰리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운전하며 이 길을 지나다 보면 튼튼한 철책 넘어 위장된 초소가보이고 초병의 근무 모습도 보였다. 대한민국의 심장부를 지키는 방어선으로 역시 한 볌의 틈새도 없을 거란 생각을 했었다. 당시 철책선 넘어 모습이 조금은 두려움과 신비감이 들곤 했었다.

 

오늘 그 철의 장막 안을 등산복 차림으로 들어와 탐방로를 걸어보니 이곳이 당시의 내 생각보다 훨씬 견고한 철옹성이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당시엔 도로 옆의 철책만 있는 줄 알았는데 성벽 아래로 높다란 2중 철책이 다시 한 번 이어지고 그 것도 미흡하다 생각했었는지 철책 앞엔 최신 첨단장비의 전자감응 촉수가 모든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 헤아려보니 6개의 방어선이 대한민국의 심장을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당연한 결과이었는지 모른다. 적의 특공대가 심장에 칼을 들이대기 직전까지 갔었으니 오죽 겁이 낫겠는가? 소 잃고 외양간이라도 고쳐야했었고, 자라보고 놀랜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창끝을 막아내는데 방패의 철갑을 아무리 두껍게 한다 해도 결코 안전을 보장하진 못한다. 성벽을 아무리 높이 쌓는다 해도 한 장의 벽돌이 허물어지면 큰 성벽도 무너지는 법이다. 성곽의 높이나 두께 보다는 적군의 의도를 알아내는 정보력과 지키는 사람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

 

'치익치익' 하는 통신 음이 요란한 무전기를 손에 들고있는 젊은이들이 요소요소마다 탐방객들의 길안내를 하고 있다. 이곳을 지키는 군인들로 보였다. 쉼터에서 식사를 하면서 한 무전기 소리 요란한 안내원에게 주야간 근무 요령과 군인이냐고 물어보니 답변해줄 수 없다고 말한다. 꽤 훈련이 잘된 병사로 보였다.

 

가파른 탐방로를 올라가는 나무 계단 길은 나 같이 무릎 관절이 불편한 사람에게는 고난의 길이다. 탐방객들을 위해 중간에 전망이 좋은 곳엔 조망대가 설치되어있고 곳곳에 쉼터도 마련되어있다. 이 길을 개방하면서 사전에 치밀한 계획과 시민의 편이를 위한 준비가 꽤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악마루에 올랐다. 이곳이 청와대 뒷산 맨 꼭대기이다. 광화문 뒤로 보이는 삼각형 모양의 산이 하늘과 맞닿은 꼭지 점이다. 지난 수 십 년 간 언제나 저곳에 한번 올라가 큰소리로 소리쳐 볼 수 있을까 생각했던 곳이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정상에는 3미터 정도의 바위가 있어 이곳 까지 올라가 사진을 찍는 사람도 보인다. 이곳이 대공 포대 진지이었다는 설명문도 붙어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상징인 북악산 정상에 대공포대가 있었다.

 

지난 수 십 년 간 돌아다보면 조금은 우습고 초라하고 험악했던 세월을 몸으로 깡다구로 겪으며 지금까지 달려온 우리들이다.

 

 

북악산 정상에서서 서울을 내려다본다. 전설대로 라면 무학 대사와 정도전도 이곳에 서서 저 아래 보이는 들과 산을 바라다보았음이 틀림없다. 과연 명당은 명당이다. 정면 멀리 바라보이는 푸른 정기를 흠뻑 먹은 관악산의 자태가 정말 일품이다. 하늘과 맞닿으며 파도치며 비상하는 좌측 공제선은 훨훨 타오르는 불꽃 모양이다. 좌측의 낙산 우측 인왕산의 구릉이 구비치며 한강을 향해 뻗어나갔고 들판 한 가운데 남산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세계 어느 나라의 수도와 비교해도 서울만큼 자연 환경이 빼어난 여건을 갖춘 대도시를 찾아보기 어렵다. 북쪽엔 수려한 북한산 남쪽엔 우뚝 선 관악산 두 산 사이를 여유롭게 흐르는 폭넓은 한강, 그리고 서쪽으로 1시간을 달리면 바다를 만날 수 있다.

 

조상들이 마련해준 아름다운 터전을 잘 가꾸고 보전하여 명품 도시를 만드는 일은 후손의 책임이다. 한강을 연해 아파트 벽으로 둘러친 천박스럽고 몰상식하고 미의식 없던 개발시대 관리들을 흉을 보기 앞서 재건축 재개발이라며 똑같은 판박이 도시를 연출해내는 지금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5층 10층짜리 성냥 곽이 30층 50층짜리 조금 커진 시멘트 말뚝으로 교체되어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면 안타까운 마음 뿐이다.

 

산마루에서 내려와 능선을 타고 숙정문 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제법 큰 소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만들어 내고 있다. 역시 이끼 낀 성곽의 고풍스런 운치는 노송과 함께 있어야 제 멋을 찾는다. 이번 성곽 길 걷기에서 얻은 소득은 또 하나가 있다. 이 길을 개방하기 전에 혜화동 방면에서 출발하여 성벽 아랫길을 따라 북악산을 오르는 걷기코스에서 관찰한 성벽의 축성 모습이 구간 마다 달랐다.

 

 메주덩이 만 한 돌들로 쌓아 올린 성벽이 있는가하면, 가로세로 60센티나 되 보이는 잘 다듬어진 큰 돌로 만리장성만큼이나 견고하게 축성된 구간도 있었다. 잘 다듬어진 큰 돌들은 아직 변색도 되지 않아 최근에 새로 보수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새로 성곽걷기 코스를 개방하면서 탐방객들을 위해 곳곳에 성벽 축조의 연대별 차이를 그림과 함께 설명해놓았다. 메주크기의 돌로 쌓은 구간은 태조5년에 최초 축성당시의 모습이고 장방형의 기본 석축 위에 잔돌을 얹어쌓은 구간은 세종4년에 보수한 구간이며 내가 최근에 쌓았으리라 생각했던 가로세로 2자 크기의 견고한 축성 모양은 숙종 때 보수한 구간이란 설명이다.

 

설명에 의하면 서울의 성곽은 북악(342m)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18.2km(59,500자)의 산성으로 1396년에 전국에서 11만8천명을 동원하여 성곽대부분을 완공하였고 그해 7,8월에 79,400명을 동원하여 동대문구역을 완공함으로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442년 세종 때 농한기에 32만 명을 동원하여 석성으로 수축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하였다. 당시 한양의 인구가 약 10만 명 이었으며 이 공사 때 죽은 인부가 872명이나 되었다 한다.

 

1704년 숙종 때 북한산성을 쌓으면서 대대적인 정비를 하였다. 이후 1899년에 청량리와 서대문 간에 전차를 부설하며 성곽일부가 헐려나갔고 일제 강점기에 평지의 성곽 대부분이 철거되어 오늘날 산지에 10.5km만이 남게 되었다.

 

신선한 솔 향을 맡으며 성곽 길을 내려가다 보면 노송 사이로 숙정문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탐방객을 맞이한다. 숙정문 밖으로 나가면 삼청각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 . 계속 성곽 길을 다라 조금 내려가면 말바위 안내소가 나온다.

 

 안내소에서 창의문에서 받은 출입증을 반납하면 북악산 성곽 답사가 끝난다. 말바위 밑으로도 성곽은 이어진다. 길 다라 내려오면 와룡공원이다. 산 아래동네 주민들의 근린공원으로 이곳부터는 운동 나온 사람들로 꽤 붐빈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빠지면 성균관대후문과 감사원 이 나온다. 내려오던 성곽 길을 따라 내려가면 서울 과학고등학교 후문이 나오고 성곽이 끝나는 지점이다.

 

와룡공원에서 성벽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면서 성벽 넘어 보이는 동네의 모습은 아주 리얼한 서울의 단면이다. 와룡공원 넘어 성곽 언덕엔 70년대에 볼 수 있었던 달동네가 아직도 그 모습을 간직하고 남아 있다. 오랜만에 대하는 산동네의 모습은 아주 친근하고 정감 있어 보인다. 건너편 산자락엔 성북동의 고급 주택들이 산 중턱 까지 빼곡이 들어차 각기 독특한 양식의 건물과 정원을 자랑하고 있다.

 

 눈을 조금 우로 돌려 보문동쪽을 바라보면 철벽같은 아파트들이 산자락을 에워쌓고 있다. 산동네 사람은 단번에 성북동으로 건너가기 어렵다. 그들의 꿈은 보문동의 철벽 아파트 일 것이다. 보문동 아파트에선 성북동을 기대하고 있을까? 달동네에서 아파트로, 아파트에서 빌라로 이 회전이 빠르고 자유로운 세상이 우리가 기대하는 살맛나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문동 철벽아파트는 아마도 서울시 흉물 1호라 명명해도 좋을 건물 군이다. 도대체 누가 저곳에 저런 고층아파트를 구상하고 건축을 허가해주었는지 궁금하다. 그런 사람들이 아직 남아있으면 와룡공원 뒤 달동네 마을을 허물고 재개발이란 이름으로 또 하나의 아파트 철벽 세울 계획을 짜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들은 노송 욱어진 성벽아래 고층 아파트를 세우면 보문동이나 성북동으로 옮겨갈 필요 없이 단번에 그들의 서민들의 꿈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지도 모른다.

 

북악산의 성곽은 서울 과학고등학교 후문에서 끝난다. 성곽 탐방을 다 마치고 혜화동 길을 내려오다 보면 괜찮은 식당들이 제법 있다. 이곳에 들려 간단한 식사를 하고 대학로로 접어들면 젊은이들로 넘쳐난다.

 

힘이 좀 남아 있으면 낙산에 올라 낙산에서 동대문으로 연결되는 성곽 길을 탐방하여 보는 것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