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경관은 어디?
서울의 산이나 강변을 걷다보면 이따금 서울시에서 선정한 '우수조망명소'를 만나게 된다. 보통은 전망대가 설치되어있고 바라보는 방향의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서 주요 지형지물을 사진위에 표시해놓은 안내판도 설치되어있다.
한마디로 시민들을 위해 경치 좋은 곳을 선정해놓았으니 감상의 즐거움을 충분히 맛보시라는 친절 행정 서비스 정신이 고맙다.
다른 지자체들도 지역의 경관이 좋은 곳을 선정하여 'oo八景' 'oo十景' '第一景'하며 관광 명소를 선정하여 홍보하기도 한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많은 여행가들이 자신들이 돌아본 여행지 중에서 어디가 최고의 경관이다 또는 秘景이다 하며 사진과 글을 올린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걷기운동을 하면서 서울시에서 선정한 꽤 많은 조망명소들을 둘러보게 되었다.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의 조망 명소는 산위나 언덕위에 위치한다. 眺望이란 단어가 말해주 듯이 멀리 바라보기 위해선 높은 곳에 위치해야 시야가 확보되기 때문이다.
시야가 확 트인 곳에 서면 바라보는 모두들 마음도 시원하고 기분도 좋아진다. 기분이 좋아져야 경관도 구석구석 눈에 들어오고 감흥도 생기는 법이다. 이 기분 좋아지는 것을 요즘은 돈으로 환산하기도 한다. 전망이 좋은 아파트나 사무실은 시세에 프리미엄으로 작용한다.
사람들은 시야가 확 트인 언덕이나 산중턱에 집을 짓는 것을 선호한다. 이런 관습의 발생 기원을 진화 심리학자들은 원시 인류가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야수들과 생존경쟁을 하면서부터 생겨나기 시작하여 환경에 적응하려는 진화의 산물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여행 중 둘러본 곳 중에서 어디가 최고의 경관인지 한군데를 선정해서 말해달라면 망설여진다. 내가 선정 한 곳이 과연 객관적인가? 하는 자문을 해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 최고의 경관이 객관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경관이란 미술품과 같아서 자기가 가장 좋은 느낌을 받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옛 조선의 선비들도 그들이 본 경관 중에서 최고의 경관을 선정하는데 논란 끝에 만장의 일치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통신사 일행들은 부산에서 배를 타고 대마도에서부터 에도(東京)까지 일본 내륙을 횡단해 가면서 '도모노우라'에 있는 '후쿠젠지( 福禪寺)'의 '다이쵸루 (待潮樓)'를 일본 최고의 경관으로 꼽았다.
사절단 일행은 "눈알 16개(8명)가 이곳이 최고임을 확인하였다"라고 기록에 남겼다. 1711년 8차 조선통신사의 종사관으로 왔던 이방언 (李邦彦)은 이곳이 일본 최고의 경관이라는 '日東第一形勝'이라는 글을 써 주었다. 이 글씨는 판각되어 누각의 벽에 높이 걸려 사찰의 자랑이 되어 내려오고 있다.
2007년에 큰 기대감과 호기심을 가지고 다이쵸루를 방문해서 받은 느낌은 내 기대와 상상했던 풍광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곳을 나와서 그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당시 통신사 일행들은 18세기의 사람들이었고 나는 21세기에 살고 있는 현대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조선 선비의 사유 체계와 문화를 이해하는 눈이 오늘날과 같을 수 없다. 당시 조선 선비들의 눈에는 고요한 바다에 떠있는 몇 개의 섬을 바라다보며 깊게 드리워진 한가함과 맑은 여백의 아름다움을 최고의 비경으로 선정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움의 인식이나 기준도 시대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던 중에 한 학생이 서울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곳이 어디냐고 불쑥 질문을 던졌다. 빨리 생각이 나지 않았다. "경치가 좋다는 것은 주관적 느낌이기에 어디가 최고라고 단정해서 말하긴 어렵다."라고 잠시 뜸을 드리고 나서 말했다. "아침 새벽에 2호선 전철을 타고 대방에서 합정역으로 가면서 창밖을 바라보아라. 잠실벌 위로 해 뜨는 모습은 내가 서울에서 발견한 최고로 멋있는 경관이다."라고 말해주었다.
아름다움이란 바라보는 시점과 보는 이의 감정 상태에도 영향을 받는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내일의 희망을 가지고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에게 달리는 열차의 창밖으로 갑자기 나타나는 해돋이 풍경은 감동의 순간으로 다가오기에 충분하다.
당산역을 출발한 전동차는 철교에 진입하면서 서서히 속도를 높인다. 우측 창밖으론 국회의사당의 모습이 나타나고 쌍둥이빌딩과 63빌딩이 눈에 들어온다. 전동차가 속도에 가속이 붙을 때 쯤 당산철교에서 잠실까지 확 트인 망망 시야가 펼쳐진다. 새벽 연무 위로 붉게 떠오르는 태양. 달리는 전철 안에서 서울의 아침을 깨우는 해돋이를 가장 멋지게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좀 더 잘 바라보기위해 목을 빼어 창밖으로 눈을 돌려 태양을 찾아 볼 때에는 전동차는 속도를 높여 철교의 가림막 어둠속으로 다시 들어가 버린다.
이 서울 최고의 해돋이 경관을 바라보기위해선 겨울날 새벽 전철을 타는 사람만이 가능하고 그것도 단지 하루에 한번 15초 만 허용된다.
(2010.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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