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오늘의 생각

내 왼발

Sam1212 2011. 6. 22. 17:20

 

내 왼발

요즘 일상의 즐거움 중 하나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아내와 함께 한 시간 정도 공원 산책을 다녀오는 일이다.

 

 천천히 걸어가며 봄이면 산수유부터 시작하여 영산홍까지 이어지는 꽃들의 화려한 향연을 즐기고, 여름엔 도시의 개구리와 풀벌레 울음소리, 가을엔 억새 언덕위에 쏟아지는 달빛, 겨울이면 소나무 밑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들어보는 즐거움은 모두 걷기에서 시작된다.

 

 

걷기운동을 하기 전에는 뛰는 운동을 주로 했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새벽 조깅으로 하루를 시작했었다. 저녁 술자리에서 폭음한 날에도 출근 전에 1시간 정도 뛰고 나면 무거웠던 몸이 개운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주말엔 등산으로 땀을 흠뻑 쏟아내면 일주간 몸속에 쌓였던 노폐물이 빠져나갔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무릎을 다쳐 차가운 철 침대에 누워 병원의 수술 방으로 들어갈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뛰지 못하고 산에는 못 오르더라도 제발 두발로 걸을 수는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 했다. 왼쪽 무릎 연골 파손, 하마터면 중요한 활동기능 상실의 위기에 놓일 뻔 했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된다. 수술 후에 커다란 상실감에 빠진 적이 있다. 강한 두 다리로 대지를 굳게 밟고서 힘차게 뛸 수 있다는 것이 남자의 정체성을 지키는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다.

다리에 힘이 빠지면 활동의 자신감이 떨어지고 신체적인 이유로 남자의 자존감까지 영향을 미침을 알았다. 가지고 있을 때는 그것을 당연한 줄로 여긴다.

 

 뛰지는 못해도 마음껏 걸을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고 행복한 일인 줄을 병원을 나와서야 알았다. 무릎 수술 이후 뛰는 운동은 자연스럽게 걷기로 바뀌었고 걷기에서 즐거움도 찾아냈다.

 

 

요즘 들어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든다. 가벼운 저녁 산책길에도 왼쪽 발에 이따금 통증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함께 걷기운동을 하는 아내는 아무래도 2007년 봄 에 무리를 한 것이 원인이라며 걱정을 한다.

 

걷기운동에 자신이 붙었을 때 자신의 능력에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 일본의 동경까지 걸어가는 행사에 참여했다. 왼쪽 다리에 이상이있는 나에겐 한마디로 무리한 도전이었다.

 

 육체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험을 했고, 당시 내 두 다리는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 덕분에 결국 해냈다. 걸으면서 많은걸 배우고 느꼈다.

 

육체적 고통의 정점에서 임계점을 넘으면 고통은 사라지고 환희가 밀려온다는 것도 그 때 체험했다. 육체가 다다른 마지막 정상에서 마주하는 고통은 쾌감과 일란성 쌍둥이 형제였다.

 

내 왼발이 자랑스럽다. 비쩍 마르고 휘어지고 못생긴 왼발이다. 그 발에도 자랑스러운 전성기가 있었다.

 

고등학교시절 태권도에 흠뻑 빠져든 적이 있었다. 시골에서 올라와 입학한 상업학교의 교과목들은 하나 같이 모두 기능 위주 과목들이었다. 한창 학구열과 감수성이 충만해있던 나에게 지적 자극을 주기에는 부족했다. 잘못된 선택에 후회했으나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단순한 신체 운동으로 보았던 태권도가 훨씬 과학적 합리성을 구비한 체계적인 운동이란 생각이 들었다. 방과 후에 체육관에가 열심히 땀흘리며 운동하는 것이 학교 생활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당시 내 왼발이 큰 역할을 했다. 왼발 옆차기와 압차기 는 내가 보아도 일품이었다. 옆차기는 10시 방향까지 뻗어나갔고 앞차기는 뻗으면 무릎이 가슴에 닿았었다.

 

나이 30이 넘어서도 이따금 집에서 왼발 무릎이 가슴에 닿는지 확인해 보곤 했다. 몇 년 전에 함께 운동을 한 친구들을 모임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 중 한 친구가 학교시절 내 왼발 옆차기에 무척 고생을 했었다고 실토하는 걸 듣고서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내 자랑스러운 왼발 ,너는 아직도 할일이 많이 남아있다.

나는 아직도 너의 능력을 믿는다.

 

                                                                                                       201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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