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오늘의 생각

할아버지가 된다는 것

Sam1212 2011. 12. 6. 15:43

 

할아버지가 된다는 것

 

친구 '해영'이 문자를 보내왔다. 할아버지가 된지 한 달이 되었다며, 손녀 모습이 너무나 예쁘다한다.

 

벌써 많은 친구들이 할아버지가 되었다. 할아버지가 된 친구들을 만날 때 마다 손녀 손자의 귀여운 모습을 자랑삼아 이야기하고 사진을 찍어 핸드폰에 저장했다 꺼내서 보여주기도 한다.

 

벌써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들어야할 나이가 되었다, 어쩌다 할아버지란 호칭을 들으면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나를 에워싼다. 지나간 시간들이 그립고 서럽고 아쉽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은 그 전 보다 빨라 보이고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하다.

 

나보다 먼저 할아버지가 된 해영이, 큰 키에 비쩍 마른 체구였으나 그래도 동복 유격장의 혹독한 여름훈련을 잘 견뎌 냈었다. 우리는 지겨운 훈련을 모두 마치고 소대장으로 부임해서 나갈 날을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날 공수부대 차출이라는 잘못 전달된 명단에 이름이 오른걸 보고 얼굴색이 하얗게 변하던 모습이 엊그제 같다.

 

나는 아직 윤기 있는 검은 머리카락을 자랑하지만 숱은 좀 줄었다. 손등에 푸른 핏줄 비치지만 팔뚝 근육은 아직 탄력이 살아있다. 팔굽혀펴기 만큼은 아직 아들 녀석 보다 더 많이 할 자신이 있다. 그러나 머지않아 할아버지로 불러지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여져야 할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오늘 아침 지하철역 계단 앞을 엉금엉금 오르며 바쁜 출근길을 방해하던 허리 구부정한 노인. 그도 한국 전쟁 때 가파른 태백산맥을 비호처럼 뛰어다니던 젊은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아침에 친구가 보낸 '할아버지'란 메시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할아버지가 된다는 것, 그 것은 생물학적으로 종의 번식에 성공했다는 인증이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분신을 남기고 사라지는 것이 제일의 임무다. 자신의 유전자를 복제해 전달하는 본능 프로그램은 신이 설계하여 우리몸에 장착한 최고의 소프트웨어다.

 

 할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은 2대에 걸쳐 지구상에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렸으니 이제는 더 이상 걱정할 필요 없이 아름다운 퇴장을 준비를 하라는 신이 보내는 눈짓 인 지도 모른다. 내려주신 소명을 차질없이 수행했으니 생물학적으로 보면  성공적인 삶이다.

 

. 우리 모두는 세상에 나와 사회 구성원의 일원이 되는 순간부터 살아가면서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물려주어야할 의무를 부여받는다.

 

 공정한 세상 공평한 세상 정의로운 세상 안전한 세상 풍요로운 세상 활기찬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데 힘을 다해 일조해야 한다. 그러려면 많은 장애물을 넘어서야하고 방해자들과 몸으로 부딪치고 때로는 사력을 다해 싸워야 할 때도 있다.

 

할아버지가 되었다는 것 그것은 사회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기엔 남아있는 시간이 부족하고  큰 일을 다시 시작하기에는 늦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그런 힘들고 험한 일들은 젊은이들에게 맞기고 한발 뒤로 물러서라는 임무 교대 명령을 받은 것이다.

 

어쩌다 흰 머리카락 휘날리며 젊은이들과 함께 대열의 선봉에서서 팔을 휘두르는 노인을 본다. 나는 별로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그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의롭고 지혜로운 어른이라면 그가 심산유곡에 살든 섬 구석에 숨어살고 있더라도 많은 이들이 찾아내어 지혜를 구하고자 줄을 설 것이다.

 

이제는 한발 비켜서서 그간 살아오면서 경험으로 터득한 지혜를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조용조용 말해주거나 글로 남기면 더욱 좋을 일이다.

 

노인이 되면 말 수가 많아진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랬다. 일제 시대 혹독했던 생활과 6.25 전쟁 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이야기들을 어린 나에게 지겹도록 전해주셨다. 매번 귀가 닳도록 들어야만 했던 일이 너무 싫었다. 과묵하시던 아버지도 80노인이 되시고 부터 노인의 함정에 빠지셨다.

 

 

듣기 싫어 도망 다니는 젊은이에게 지겹도록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자신의 DNA를 복제한 분신들에게 앞으로 이 땅위에 어떤 고난이 닥치드라도 멸망하지 않고 대대손손 번창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는 신이 설계한 원초적 본능을 담은  소프트웨어가 수명이 다할 때까지 잘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징표다.

 

 

 

                                                                              2011년 8월 1일 (친구의 핸드폰문자를 받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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