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점심 때 식사 기도를 하는 일은 크리스천에게 당연하고 일상적인 생활이다. 우리가 이런 일상적인 믿음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한다. 이런 일상에도 누군가의 땀과 눈물이 맺힌 희생과 노력이 숨어 있다.
한국 교회사에 널리 알려진 훌륭한 목회자분들이계시다. 그러나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과의 약속과 말씀을 충실하게 지키고 떠난 숨겨진 사람들도 있다.
얼마 전 김수만 장로의 전도와 교회 개척사를 역어낸 책(김수만 장로 절면서 열 교회를 세우다/임희국 엮음)을 읽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까지 가슴 뭉클한 이야기들이다. 어떻게 한 인간이 저런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 지금 까지 글로 접한 최고의 인간 승리이며 사랑의 실천 현장 역사였다.
김수만은 정규 신학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그가 활동내역을 글로 남기지도 않았다. 그의 복음 전파 활동을 지켜보았던 많은 이들이 있었다. 김수만 장로가 세상을 떠난 지가 30년이 넘었으나 그의 복음 전도 활동을 생생히 기억하고 증언한다. 김수만과 함께 했던 이들은 그를 ‘작은 예수’ ‘성자’ ‘안동의 바울’이라 부르기도 하며 어떤 이는 사도 바울 보다 더 험하고 어려운 전도활동을 했다고 증언한다.
김수만 장로는 1901년 경북 안동 남후면 광음리 농촌 마을에서 태어나 1971년에 돌아가셨다. 청년 시절 일본에 건너가 기술을 습득하고 돌아와 40세에 ‘통통방아’라 불리는 행상 정미소를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42살 되던 해에 삶을 통째로 바꾸게 된 큰 사고가 있었다. 방아 기계를 자전거에 실고 수리하러 가다 낭떠러지서 굴러 오른쪽 다리를 크게 다쳤다. 의료 시설이 미흡했던 시절 돌팔이 의원의 잘못된 치료로 상처는 크게 악화되었다. 병원을 찾았으나 회복 불가 판정을 받고 결국 오른쪽 무릎 위를 절단하게 된다.한창 활동할 나이에 한쪽 다리를 잃은 김수만의 마음의 상처 또한 당연히 컸으리라 생각된다. 절뚝거리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 얼마 동안 집밖을 나가는 일을 꺼렸다한다. 병원에서 만들어준 고무로 된 의족은 너무 무겁고 불편해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김수만은 동네 사람들 모르게 캄캄한 밤이 되면 목발을 집고 집근처 산에 기어올라 새벽까지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하나님 다시 걸을 수 있게 해준다면 남은 생애를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저 자신을 바치겠습니다.” 간절한 서원 기도는 여러 날 동안 계속 되었다. 어느 날 기도 중 환상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속에 들려왔다. “네가 달라는 그 다리가 길가에 있는 줄을 왜 모르느냐?” 늘 다니던 산길에서 기억자로 굽은 소나무를 발견하고 베어 가지고 집에 돌아와 직각으로 굽은 부분은 발을 덜 굽은 부분은 무릎을 만들어 다리 기리와 똑 같은 의족을 만들어 잘려나간 다리에 끼웠다. 여러 번의 걸음마 연습을 통해 의족으로 절뚝거리지만 보통 사람들처럼 걷게 되었다.
김수만은 운산리 마을에서 1 킬로미터 떨어진 소호리 교회에 나가면서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았고 가정 예배를 인도했다. 1948년 가을 어느 날 지붕에 올라 이엉을 얹던 중에 하나님의 음성 “네가 무엇을 하느냐?”를 듣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일어 생업을 포기하고 가족의 생계도 하나님께 맡긴 채 본격적인 복음 전도 활동에 나선다. 1954 년부터는 안동교회 전도인으로 파송 받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처절한 전도와 교회 개척 활동이 시작된다.
김수만은 마을의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 전파를 하고 다녔다. 초기에 두꺼운 마분지로 후에는 함석으로 나팔 모양의 확성기를 만들어 동네마다 돌아다니며 “예수 믿으라” 소리치며 전도 활동을 했다. 김수만의 절뚝거리는 다리로 전도 활동에 나서면 동네 꼬마들이 뒤를 따라다니며 절뚝발이 흉내를 내는 일은 예사였다. 좀 큰 청소년들은 언덕에서 밀어서 굴러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웃고 즐기곤 했다.
안동 지역은 우리나라에서도 유교적 전통이 강하고 성씨 위주로 집성촌을 이루어 외부인에 대한 배타성이 강한 지역이다. 불신자들은 예배 시 부르는 찬송가 소리가 재수 없다며 불만을 표출하고 과격한 이는 성한 다리마저 분질러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심지어 예배당에 불을 지르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김수만은 조롱하고 핍박하는 이들에게 전혀 화를 내거나 한번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김수만은 복음 전도활동을 조롱하고 핍박 했던 소년들과 청년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 복음을 전하고 개척한 교회의 중심인물로 성장시켰다.
김수만이 전도 활동을 벌인 안동의 길안면 남후면 임하면 지역은 산골 마을 지역이다. 1950~1960년대 하천에 제대로 된 다리나 산 고개를 넘는 포장도로가 당연히 없었다. 냇물에 통나무를 엮어서 만든 다리를 건너가다가 목발이 나무 틈에 끼어 물속으로 떨어져 떠내려가기도 하고 얼어붙은 냇물 징검다리를 건너다 얼음판에 미끄러져 물에 빠지고 눈 싸인 험한 산길을 넘으며 전도 활동을 계속하였다.
전도 활동의 성과로 몇 명의 신도가 모이면 시골 집 마당에 멍석을 깔고 예배를 드리거나 방 한 칸을 빌려 예배를 가졌다. 신도들이 늘어나 교회를 건축할 때는 나무를 베어다 기둥을 만들고 신도들과 함께 직접 벽돌을 찍어 벽을 쌓았다. 김수만의 연장을 다루는 솜씨는 목수에 가까웠다. 웬만한 것들은 직접 자르고 베고 깎고 했다. 천장에 석회를 바르다 눈에 횟가루가 떨어져서 실명할 번한 적도 있고 강에서 돌을 주어와 4미터 높이의 종탑을 목발을 집고 쌓아 올릴 때는 목숨을 건 곡예에 가까웠다. 김수만이 직접 신축을 주관한 교회는 개곡교회,고곡교회,길안교회,금곡교회,금소교회,송사교회,신덕교회,임하교회다.묵계교회는 건축을 시작만하고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한국전쟁도 김수만 장로를 정면으로 휩쓸고 지나갔다. 전쟁 전 1947년 2월 지역에서 빨치산 청년들의 준동이 있었다. 우익 활동을 하던 청년을 때려죽이고 김수만 장로를 덮친 청년들에게 김수만이 집단폭행하는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경찰에 체포된 청년들과 김수만의 대질 확인이 있었으나 김수만은 맞으며 정신을 잃어 얼굴을 기억할 수 없다며 그들의 이름을 끝내 말하지 않았다. 인민군의 점령기간에 피난지에서 간첩혐의로 붙잡혀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즉결처형을 당하게 된 순간에 이들 좌익 청년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목회 활동도 할 수 있었다.
복음 전도 활동에만 전념하다보니 당연히 가족의 생활에 고난이 따랐다. 집과 떨어져 혼자 생활하는 김수만의 불편을 덜기위해 초등학교에 다니는 막내가 함께하며 아버지를 도왔다. 극심한 영양실조에 시달리던 막내는 큰 병을 얻어 고생하다 세상을 떠나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 겪는 온갖 조롱과 핍박 가족이 겪는 고난을 당연함으로 받아 넘기며 한번도 화를 내거나 불평을 하지않았다. 김수만 장로님은 1971년 10월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10번째 건축 중인 묵계리 교회의 완공을 보지 못했다. 남은 이들이 교회건축을 완공하고 교회 머릿돌에 “절면서 열 교회를 세운 고 김수만 장로(1902~1972)를 기념해 이교회를 짓는다.”는 문장을 새겨 넣었다.
그와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수만은 천당 갔을 것이다”
"예수를 믿을라면 김수만 같이 믿어야한다."
**증언록**
싸우지도 않아요. 그 사람 혼자서 막 나대지요. 혼자서 마구 밀고 마구 가라고 인자 얼른 딴데로 가라고, 인제 밀고 이래도 김수만 장로님은 입도 안 떼지요. 입 안떼고 사는 길이 이 길이 좋은 길 이기 때문에, 모르기 때문에 이래 알려 줄라고 이래 왔다고 수만 장로님이 그럽디다. (전형례 71, 묵게교회 집사)
장로님은 항상 웃으시지요. 웃으시면서 정말 장로님 말씀하신 거 불가는능은 없다지요. 그래서 저도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제 이야기를 해도 될지 모르지만, 장로님 그 말씀에 저도 힘이생기고 믿음이 자라면서 저도 믿음이 강해지더라구요. (정순남 53, 용계교회 권사)
장로님이 와서 찬송하고 마구 예수 믿으라 하니까 "그 놈의 자슥 지 그렇게 하나님 잘 믿으면 지 다리나 고치지 절면서 남에게 전도 하겠다고" 막 그놈의 자슥 저놈의 자슥하면서 그랬어요.(김영수85, 묵계교회)
김수만 장로님은 정말로 사랑이 많으시고 지금 이 시간 그때 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먼저 납니다. 제가 어렵고 힘들 때 장로님이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십리나 되는 저희집에 오셔서 완고하신 부모님을 설득시키시면서 불편하신 몸으로 산넘고 물건너 이동네 저 동네 주님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어려움을 마다하시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신 훌륭하신 장로님 입니다.(정순남 53, 용게교회 권사)
저 종탑은 그 돌 하나하나를 전부 장로님 손으로 옮겨 가지고 쌓은 종탑입니다. 우리는 저녁으로 모여서 리어카로 강변에 있는 돌을 실어 놓으면 낮으로 장로님이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서 그 당시에는 계단도 없고 굉장히 경사가 심한데 여기서 하나하나 앉아서 옮겨가며 쌓은 종탑입다.(유재석 54, 임하교회 장로)
나는 그를 성자라고 그렇게 내 마음에 여깁니다. 나는 내가 아는 사람 본 사람 가운데 그이처럼 존경할 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 입니다."(김광현 91,안동교회 원로목사)
이 장로님이 얼마나 겸손하시고 남의 신세를 안질려고하는지 그 날 저녁에 내가 그때만 해도 차가 많이 없을 때 입니다. 택시를 내가지고 모실라고 했는데 굳이 걸어가시겠다고 해 가지고 나는 진료시간이 아직 좀 남아 있는 동안에 장로님은 미리 출발을 하셔가지고 거 떼를 쓰면서 가시는걸 봤어요.(배명직 77, 강남의림한방병원장)
완전히 목발을 가지고 짚고 다니시면서 골짝 교회를 개척하셨는데 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장로님 그 목발 쥐고 다니는 데 참 힘이드는데 얼마나 힘이듭니까?" 장로님이 말씀하시기를 "꼭 쌀 한가마니 지고다니는 힘이듭니다" 길안면 골짝골짝 금곡 같은데는 하늘 밑 첫동네라는 그 동네도 개척하셨는데 그 험한 길에 목발을 짚고 다니면서 개척하셨습니다.(조석규 63, 서울 남광교회 담임목사)
예수님을 하나도 믿지 않는 동네를 찾아가서 온 가족을 (7식구)를 끌고 다녔으면, 지금 내 생각에 아마 믿지 않던 사람들이 먹고 살려고 전도하는 구나 하고 전도가 더 안됐을 것 같다.
금소 동네에 있을 때는 아버님이 지나가면 못된 아이들은 많이 놀렸다. 나도 어릴적에 하도 놀림을 받아서 학교 가기가 싫었다. "장로딸, 예수딸 쩔뚝발이 딸 지내간다 " 애들이 돌을 던지고 여러명이 괴롭히고 놀려대었다.
내가 어릴때 자다가 깨어보면 "감사, 감사,감사" 감사 소리를 100번도 더 하셨다. 아주 감사로 노래를 부르셨다. 날마다 하도 많이해서 듣기가 싫을 정도였다. 뭐가 그리 감사하냐고 따지고 물으면, 아버지는 지금 살아있는 것도 감사, 건강한 것도 감사 교인들을 보내주셔서 감사,딸이 옆에 있어서 감사 뭣 하나 감사로 시작해서 감사로 마치는 분이셨다.
(김영순 55, 막내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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