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오늘의 생각

가마감

Sam1212 2019. 7. 15. 14:59

가마감

 

80년대 영업 부서에 근무하면서 매달 가마감을 했던 기억이 있다.

가마감은 기업의 영업부서나 기간별 실적을 관리하는 부서에서 사용하는 용어다. ‘마감이 일의 끝마침이나 어떤 행위의 종료를 나타냄을 일컫는 용어라면 가마감은 마감의 수치를 사전에 어림잡아보는 일이다.

 

모든 영업 부서에는 목표가 수치화되어 주어진다. 부서 책임자는 자신의 모든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하여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고 결과로서 평가를 받는다. 당시 한국경제의 고도 성장기였다. 전 산업 분야에서 과감하고 도전적인 목표 설정이 관례였다.주어진 목표의 달성은 물론 초과달성이란 목표 지상주의가 팽배하던 시기였다.

 

매달 주어지는 영업 목표. 25일 정도에 가마감을 해본다. 제품별 경로별 거래선별 현재의 실적을 파악하고 향후 남은 몇 일간 가능한 추가 매출을 집계해보면 당월의 매출 목표 달성 여부를 가름할 수 있다. 그리고 남아있는 역량과 관록 지혜를 총 결집하여 최종 돌격선을 돌파하고 목표달성의 환희를 맛본다.

 

실제로는 이런 정상적인 목표 관리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데 문제가 발생한다. 100미터를 12~13초에 뛰는  선수에게 10초에 돌파하라는 목표가 주어진다. 정상적인 노력과 의지로는 불가능한 목표 수치다. 그러나 가끔 이 목표를 달성하는 선수들이 나타난다. 어떤 때는 출전 선수 모두가 목표를 달성할뿐 아니라 9초를 달성하는 기적도 목격한다.

 

영업 현장은 전쟁터와 비교된다. 예상했던 경로로 예측했던 화력으로 적의 공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전혀 예측 못했던 상황 변화와 많은 돌발 변수 들이 나타나 무질서와 혼돈의 시장이 발생되기도 한다. 이런 무질서 혼돈의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마감의 전술과 전략이 더욱 요구된다.

 

영업 현장에 있을 때 항상 생각하고 강조했던 말이 있다. 이달의 실적은 최소 6개월 전에 예정된 결과다. 오늘의 결과물은 오래전에 미리 준비하고 개선하고 개척한 노력의 집적물이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지 당월 한 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마감의 중요성은 여기에 나타난다. 무리를 해서라도 목표달성을 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남은 역량을 미래를 위한 준비와 투자에 투입할 것인가를 결정해야한다.

 

영업 현장에서 두 부류의 사람들을 목격한다. 어떤 무리수를 사용해서라도 목표를 달성하고자하는 사람과 현실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사람이다. 내가 몸담았던 영업 현장에는 미출가출이란 용어가 있었다. 실제 제품이 거래처에 정상적으로 출고되지 않은 상태에서 장부(전산)상으로 출고되는 것을 말 한다 . 이런 변칙적인 방법이 누적 되고 쌓이면 부정과 범죄의 온상이 되고 개인과 조직에 큰 상처를 남기곤 했다.

 

또 한 부류는 현실을 수용하고 인정 하는 사람들이다. 당장의 목표 미달이라는 수치심과 질책을 감내하며 미래를 위해 차근차근 준비해 나간다. 모두가 미친 듯 목표달성을 위해 상상 가능한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는 분위기에서 이런 결정내리는 것도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다.

 

우리의 삶도 영업 현장과 유사하다. 모두들 꿈 많던 젊은 시절에 품었던 이상과 목표 달성을 향해 앞만 보고 전력 질주해간다. 어느 시점에서 차분히 가마감을 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젊은 시절에 세웠던 목표를 무리 없이 모두 달성하는 이는 드물다. 능력에 비해 과한 목표를 설정했을 수도 있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 변화로 목표와 떨어진 먼 길을 헤매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세월의 변화에 따라 목표의 가치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도 머리카락이 희끗해지고 이마에 주름살이 보이기 시작 할 때 자기 삶을 가마감 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현재 자신의 위치와 역량을 모두 들어 내놓고 하나하나 점검해본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가치의 변화가 없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지금까지 경험과 터득한 지혜를 더하여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보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실행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젊은 시절 영업 현장에서 겪었던 가마감 습관으로 남들보다 좀 일찍 가마감을 해볼 수 있었던 것도 복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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