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오늘의 생각

쌀 이야기

Sam1212 2015. 1. 8. 13:33

 

 

 

쌀 이야기

 

아파트 베란다 구석 허드레 물건들과 함께 쌀 포대가 놓여있다, 지난해 고향에서 택배로 보내온 3개중에 하나다. 

우리 집도 애들이 군에 입대한 이후로 식구가 줄어 쌀독에서 쌀 줄어드는 속도가 몰라보게 늘여졌다.

얼마 전 까지도 귀한 대접을 받던 쌀이 베란다 분리수거 통 옆에서 이렇게 홀대를 받는 모습을 바라볼 때 마다 기분이 묘해진다.

5,6십년대 한국의 농촌을 경험해본 이들은 쌀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였는지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 농촌 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쌀 을 한 알이라도 함부로 버리는 것을 죄악시 했다. 나는 지금도 쌀 포대를 쌀 독에 부을 때 마다 흘리지 않도록 조심을 한다.

 

서양 학자 제레미 다이아몬드는그의 책  '총균쇠'에서 인류 문명 발달 원동력이 된 소재를 총과 병균 그리고 쇠라고 했다.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 동양 역사는 쌀과의 투쟁사라고 말하고 싶다. 인간이 수렵채집 생활에서 정착생활로 바뀌면서 농업은 생존의 근본이 되었고 아시아에서는 쌀이 그 중심에 있었다.   많은 전쟁들도 그 배후에는 주식인 쌀을 차지하기위한 투쟁사다.

 

쌀 생산을 위해 인간의 노력과 투쟁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여러 곳에서 역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중 하나로 우리나라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간 마을의 다랑이 논이다. 산간 오지를 지나갈 때 마다 가파른 산 능선을 깍아서 돌담을 쌓고 논둑을 만들어 층층을 이룬 작은 다랑이 논들. 나는 이를 쳐다볼 때마다 당시 농부들의 절실했던 투쟁 결과에 감동을 받는다. 우리나라 뿐 아니다. 중국 산악지대 소수민족 마을이나 동남아의 필리핀 인도네시아의 정글 속의 산악마을에서도 이들의 위대한 업적을 확인 할 수 있다. 마치 지도상의 등고선 같은 다랑이 논(Rice Terrace)들이 표고 수 백 미터 산 정상까지 올라가 있는 지역도 있다. 가파른 산악을 계단식 논을 만들고 수로를 내고 물을 끌어드려 쌀농사를 지은 오지의 농촌 모습을 보면 중국의 만리장성 보다 더 많은 시간과  땀이 투여되었음을 알 수 있다.

 

 

2007년 한 국제걷기행사에 참가해 일본의 한 지방 도시의 오래된 식당에 들렀다. 벽에 음식 가격표가 액자에 넣어 걸려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밥 한 끼와 쌀 한 말과의 비교표였다. 에도시대부터 현대까지 족히 200년 동안 한 끼 식사를 쌀로 환산한 가격이다. 쌀의 시대별 환금성을 보여주고 있어 매우 재미있고 놀랐다. 일본 또한 쌀이 생활의 중심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사례다. 고려 시대 왜구의 창궐 조선시대 임진왜란 어찌 보면 모두 일본 열도에서 부족한 쌀의 확보가 침략의 배경이라 말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수 천 년 동안 이어진 이 쌀과의 투쟁이 2,000년대로 들어오면서 이 땅에서 실질적으로 종말을 맞이하고있다.  일부 빈곤층과 한반도 북쪽에선 아직 이 전쟁이 지속되고 있지만 남한의 보통 사람들은 수 천 년을 짊어졌던 멍에를 우리세대에서 내려놓은 것이다.

 

우리세대가 맞이한 최고의 축복이고 영광이다. 반대로 쌀 농사를 주로하는 농업인에겐 시련과 고난의 암울한 터널을 지나가고있다.

이 쌀로부터의 해방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젊은 세대들은 모르고 있다. 우리 집 애들도 물론이다. 나는 아직도 밥상머리에서 쌀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려고 노력을 해보지만 애들은 그리 실감하려 들지 않는다.

 

이야기를 좁혀서 내가 선대로부터 들은 우리집안의 쌀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전하고자한다.

 

 

이야기1.

할머니한테 전해들은 이야기다. 물론 이 야기를 할머니도 시집와서 아마도 시어머니나 시할머니한테 전해 들었을 것이다. 나의 6대조(崔光煥) 할아버지 되시는 분이 충청도의 예산에서 사셨는데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이 몰락하고 어린 소년은 어머니와 함께 청양으로 숟가락과 밥그릇 하나만 들고  이주하셨다. 시기를 예측해보면 약 250년 전 조선 영조 때로 추정된다.

 

그들은 지금의 고향마을 산언덕에 움집을 짓고 생활하면서 남의 농사일을 도와주면서 생활의 터전을 잡았다.

가진 것은 오직 건강한 몸 하나, 나이가 들면서 열심히 남의 일을 해주며 생계를 이었다.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던지 여름 땡볕에 논에서 일하다 논 바닥에 쓰러져 돌아가셨다. 아마 일사병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가진 것 없는 그는 변변한 장례절차도 없이 논이 바라다 보이는 남의 산 자락에 끝에 묻혔다. 이 분은 결국 자기 땅 한번 밟아보지 못하고 열심히 남의 논 일만하다 돌아가셨다.

그가 죽고 아들 역시 해가 뜨면 일을 시작해서  해질 때까지 남에 땅을 가꾸었다. 근면하고 억척스런 2대의 노력으로 드디어 꿈에서도 그리던  자기 땅을 같게 되었다. 마을 건너 응달에 작은 천수답을 처음 사고 무척이나 기뻐했다 한다. 자기 땅에 벼를 심고 가뭄에는 샘에서 물을 길어다 날라 부었다한다. 이들의 피나는 노력은 이후로도 몇 대를 더 이어졌고 나의 증조부대에 이르러 천석 정도에 이르는 지주로 부를 쌓았다.

 

조상을 돌이켜보면 조금 고지식한 면도 있지만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노력하는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았음에 감사드린다. 그리고 논에서 일하다 죽은 조상을 생각하면 앞으로도 어찌 한 톨의 쌀이라도 함부로 할 수 있으랴.

 

 

이야기2.

할아버지께서는 20년대 초에 황해도 해주라는 곳에서 직장생활을 해서 아버지 형제들 모두 그곳에서 낳고 자라 해방 후에 월남하셨다. 아버지는 출가해 가정을 이룬 큰 고모와 함께 해방 다음해 일찍 월남하셨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형제들은 어렵게 몇 번의 월남 시도 끝에 가까스로 사선을 넘어 내려올 수 있었다.

 

월남하여 부모님 댁에 합류하여 한 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자 아버지의 4촌 형제들이 그리 호의적이지 안았다 한다. 당연한 일이었다. 북에서 38선을 안 넘어왔으면 할아버지 몫의 유산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선생으로 직장을 구해 나가고 있었고 동생인 고모는 대전에 있는 언니 집에서 학교(대전여고)에 다녔다. 하루는 아버지께서 학교에서 돌아와 할아버지(증조부) 방 앞을 지나가는데 4촌 형이 뒤주에서자루에 쌀을  담고 있었다. 어디에 쓰려고 쌀을 담느냐고 물었더니 대전에서 하숙하고 있는 막내 동생(대전고)에게 보내줄려고 담는다했다. 아버지께서 나도 동생한테 좀 보내줘야겠다고 쌀을 담고 있는데 4촌 형이 할아버지한테 가서 아버지가 쌀을 퍼낸다고 고자질을 했다. 당시에 쌀은 현금과 동일시되였기에 가족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화가 잔뜩 난 할아버지(증조부)가 아버지를 보고 이 나쁜 놈 어디서 함부로 쌀을 퍼내느냐고 당장 집에서 나가라고 호통을 치셔서 집에서 큰  소동이 벌어졌다.

 

한 집에서 눈치를 보며 살던 할머니가 아들이 할아버지(시아버지)한테 혼나는 것을 보고 이 때 까지 참았던 울분이 폭발했다. 할아버지 몫의 집과 땅을 분재 해줄 것을 시아버지 한테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큰 댁 아래 작은 집 방에 들어 누워 1주일간 단식투쟁을 벌이며 결국 집과 전답을 물려받았다. 원래 할머니는 무서운 의지와 투쟁 정신을 가진 분이다. 한 번 의지를 가지시면 끝을 볼 때 까지 가는 분이다.

 

 

할머니가 재산 분배를 요구한 것은 나름대로 사연이 있었다. 할머니가 최씨 집안으로 시집오기 전 양 가는 꽤 많은 부를 축적하고 전답 매물이 나오면 서로 먼저 사들이는 경쟁관계에 있었다. 지금이나 당시나 자본가가 부의 재 축적에 월등하게 유리한 구조다.  인근 마을에 꽤 큰 논 매물이 나와서 최씨 집안과 이씨 집안(할머니 친정)에서 서로사려고 경쟁이 붙었다. 당시 할머니께서는 최씨 집안으로 시집오기로 혼약이 되어있었다. 결국 양가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최씨집에서 구매권을 가지고 소유 명의는 며느리가 될 할머니 이름(이영순)으로 등기하기로 한 것이다. 내 어렸을 적에 꽤 많은 논들이 할머니 명의로 되어 있어 논을 매각할 때 할머니 눈치를 보며 할머니 이름이 새겨진 목도장을 소중히 보관했던 기억이 있다.

 

할머니가 가지고와 남아 있던 땅이 수 년 전 공적 기록부에서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재산 가치로 얼마 안 되는 것이지만 그 스토리를 잘 알고 있는 나는 무척 서운했다. 할머니의 땅을 지켜드리지 못한 미력한 도시인이 된 내가 부끄러웠다. 이제 가을에 고향에서 택배로 쌀을 받으며 할머니를 추억할 일도 없다.

 

 

 

이야기3

모든 전쟁은 주민들에게 혹독한 식량난을 경험하게 한다. 6.25 전쟁을 격은 세대는 식량 부족으로 인한 배고팠던 저마다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고 전후 세대들에게 들려주려고 한다. 한국 전쟁 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한 끼 식사를 해결하기위해 어떤 일들을 했는지 당시의 기록 화면들이 요즘도 TV화면에 이따금 방영된다. 피난 대열에서 또는 아무 연고가 없는 피난처에서 한 끼 식량을 해결하기위해 겪어야했던 피눈물 나는 고생담들이다.

 

한국전쟁 당시 외갓집은 인천에서 배로 서산으로 내려와 합덕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나도 어렸을 때 방문했던 기억이 있다.어머니는 전쟁 중에 결혼하셨다. 남들처럼 변변한 혼수 도 준비해 오지 못해서 할머니에게 마음의 짐을 지고 계셨다. 결혼 후에도 전쟁 통에 피난 나와 사시는 친정의 염려가 마음 속 한편에 당연히 자리 잡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다고 시부모의 눈치 보지 않고 친정에 자주 방문하기 어려운 일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어머니는 어렵게 시간을 내서 친정을 방문했다. 피난살이 어려운 생활 형편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계셨다. 식사 시간에 어머니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셨다. 흰 쌀밥이 가득하게 상에 올라온 것이다. 놀라는 어머니를 향해 외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네 시아버지, 사돈께서 쌀을 한 가마 보내주셔서 잘 먹고 있다."

어머니는 전혀 모르고 있는 사실이었다. 쌀이 여유가 있을지라도 할머니(시어머니) 모르게 사돈집에 한 가마 정도를 보내기는 아주 어려운 일 이라는 것을 어머니는 잘 알고 있었다. 특히 할머니(시어머니)의 눈을 피해 쌀을 전달하려면 사전에 치밀한 준비와 몇 단계의 노력이 들어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집안 식구들 아무도모르게 이일 을 진행하시고  일에 대해서누구에게도  말 한 적이 없음은 물론 어머한테도 한 번도 생색을 내신적이 없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시아버지)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돌아가시기 전까지 가지고 계셨다.

 

쌀 이야기4

해방 후 월남해 온  할아버지 친구 분들은 경제적으로  고통을 겪으셨던 분들이 많았다. 아무 연고 없이 내려온 분들은 물론이거니와 연고가 있더라도 당시의 사회상으로 보아 생활 기반을 버리고 월남하였기에 남에서 다시 생활 터전을 잡기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터전을 잡기도 전에 한국 전쟁이 또 터졌으니 그 들이 격은 고초들은 혹독 했으며 그 생활 중심에 쌀이 있었다.

 

북에서 직장에서  혹은 지인으로 가깝게 지내다 월남해 힘들게 생활하던 친구 분들에게 어쩌면 할아버지는 부러움의 대상이될 수도있었다. 부모님 덕분에 쉽게 터를 잡고 생활의 안정을 잡았기 때문이다. 친구 분들 사이에 소문이나고  도움을 청한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도움이란 당장 호구지책인 일거리와 쌀을 구하는 일이었다.

 

대전에 사는 할아버지 친구 한 분이 도움 요청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집안 식구 아무도 모르게  인편으로 공주까지 쌀을 전달하면 그분이 자전거를 가지고 대전에서 공주까지 나와 받아 가지고 갔다. 아버지께서 대전에 직장을 잡아 가게 되었을 때 할아버지께서친구 분에게 도움 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혹 어려운 일이 생겨 찾아가면 도움을 받을 수 도 있다며 주소를 알려 주었다. 대전에서 직장을 다니던 아버지께서 하루는 시간을 내어 그 친구 분을 찾아뵈었으나 그 때까지 생활이 어렵게 보였고 당시 할아버지의 도움을 고맙게 생각하고 계셨다고 말씀하셨다.

 

할아버지와 황해도 해주에서 고향이 같아서 친하게 알고 지내던 권ㅇㅇ이란 분이 계셨다. 그분도 해방 후 월남하여 청양으로 내려오셨는데 생활터전이 없어 월남 초기 할아버지께서 방을 한 칸 내주어 얼마간  함께 지내셨다 한다.

농사짓던 분도 아니고 고향에 토지를 가진 것도 없고 특별한 기술도 없어 생계가 막막하셨다한다. 그 분께서 생각해내신 대책이 작은 기술로 생계를 이을 수 있는 직업이 고무신을 때워주는 직업이었다. 그러나 그 일도 돈이 있어야 기계를 장만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께서쌀 1가마를 주어서 그 기계를 구입했고 일을 시작하셨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무신을 신었고 당시 고무신도 비싼 생활용품이어서 떨어지거나 찢어지면 때워서 수명을 연장해서 신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6.25 전쟁에 터지고 북한군이 부산과 경남 일부만 제외하고 남한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할머니는 그 당시를 '인공(인민공화국)'때라 불렀다. 할아버지가 인공에 잘 협력하지 않았다 해서 붙잡혀 가셨다. 읍내의 농협창고에 여러 명이 수감되어있었다 한다. 당시 우익으로 분류된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갔고 인천 상륙작전 성공으로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모두 학살을 당했다.

 

권ㅇㅇ이란 분의 조카가 북한군에 입대하여 평양 방어사령부의 고급 장교로 있었다. 그 는 큰 아버지가 월남하여 고향으로 내려가셨다고 들었는데 무사히 내려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몹시 궁금했다. 부하 군인 한 명에게 임무를 주어 알아보고 올라오라했다. 그가 내려와 상관의 큰아버지인 권ㅇㅇ을 만났다. 권ㅇㅇ이 그 병사에게 부탁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생활 터전을 잡은 것은 먼저 내려온 형님(할아버지) 도움 때문이라며 그 분이 지금 붙잡혀와 감금되어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분 만큼은 꼭 풀어 주고 올라가야한다고 부탁을 했다.

 

당시 남북은 낙동강 전투에 사활을 걸고 있었고 북도 점령지엔 소수의 경비 병력과 좌익 인민위원회가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고 있었다. 평양에서 내려온 그 병사(부사관 급 병사)는 현지에서 무시 할 수 없는 상당한 권력자였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죽음의 문턱에서 무사히 풀려났다. 평양에서 온 그 군인은 할아버지의 죄목을 적은 조서까지 빼내어 돌려주었다. 그 조서의 필적을 살펴보니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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