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오늘의 생각

아름다움(美)에 대하여

Sam1212 2015. 2. 5. 13:59

못다한 질문들

 

안양천 걷기를 마치고 해영과 종로 3가에서 헤어졌다. 2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선 많이 걸어 가야한다. 아직 퇴근 시간이 멀어 서인지 환승 통로는 한가했다. 배낭을 메고 발걸음을 빠르게 움직이는데 앞에 흰 지팡이를 짚고가는 여인을 만났다. 흰 색 지팡이로 보아 시각장애인 같아 보였다. 그녀 앞을 지나가면서 곁눈질로 얼굴을 쳐다보니  안경도 쓰지 않았고 40대 여성으로 정상인과 다름없어 보였다. 계단이 나타났다. 뒤에 따라오는 시각장애인이 걱정되어 걸음을 멈추고 기다렸다. 앞에 계단이 있다고 말해주고 팔을 부축해 주었더니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환승 정류장에 도착해 여인에게 물어보았다. 지나치면서 눈을 쳐다보았는데 정상인과 다름없어 보여 오해했다고 말했다. 보통 시각장애인들을 보면 검은 안경을 착용하거나 눈이 감겨있거나 안구에 이상이 있어 보인다.. 아무런 이상이 없어 의심을했다고 말했다. 여인이 수긍을 하며 눈이 외견상 정상으로 보이나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열차가 도착해 소매를 살짝 끌어 탑승을 도와주었다. 나의 친절을 감지했는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다시 감사의 표정을 보냈다. 자리가 없어 문 옆에 서서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었던  몇 가지를 질문을 했다. 그는 태어날 때는 정상이었으나 초등학교시절부터 눈이 안 보이기 시작해 지금은 전혀 앞을 볼 수 없고 단지 빛만 희미하게 감지할 정도라고 말했다.

 

 

 오래전부터 시각장애인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질문들이 많이 있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뛰노라." 라는 시 한 구절 처럼 보통의 사람이라면 비갠 하늘에 떠오른 아름다운 오색무지개를 바라보면 감정의 변화를 가져오며 때로는 탄성이 터지기도 한다. 

 

 우리 인간은 대부분의 정보들을 시각을 통해 받아들인다. 이정보들은 뇌에 입력되어 기억으로 지식으로 개념으로 만들어지고 재활용된다. 내가 제일 궁금해 하는 것은 시각 정보가 없는 시각장애인들은 아름다움(美)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한다면 그 개념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우리가 정원에 붉게 피어난 장미가 아름답다고 느낀다면 그 것은 우선 빛이 존재하여야한다. 그 빛으로 인하여 수많은 자연의 색 중에서 빨간색이 구별되어야한다. 또한 지금까지 정원에 존재하지 않던 색이 어느 날 새로 생겨났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들도 그 것을 보면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이 생략된 시각장애인들은 우리와 같이 붉은 장미를 보며 아름답다는 감정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예로 젊은 남성이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면 애정이란 감정의 변화가 온다. 아름답다는 것은 형태의 미이며 색채의 미다. 검은 머리 맑은 눈동자 붉은 입술은 색채 미이다. 오뚝한 코 늘씬한 키 볼륨감 있는 몸매 모두 시각이 만들어낸 형태미의 기준이다.

 

 

 시각장애인은 원초적으로 이런 시각 정보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여성의 아름다운 미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들이 시각 정보에서 오는 형태나 색채의 아름다움이란 개념이 없다면 또는 우리와 다르다면 그들의 감정의 영역도 우리와 다르고 표현 방법도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아름다움과 추함의 구별이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인가?

 

 

 오늘 모처럼 친절한 시각장애인을 만나 호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질문의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물어보고 싶은 것은 많고 내려야 할 역은 다가오고 정작 깊이 있는 질문은 들어가지 못하고 다음 역에서 아쉬움을 남기고 헤어졌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빛이 생겨라, 그러자 빛이 생겼다"(창세기1.3) 빛이 있어야 형태가 존재한다. 빛이 있어야 만물의 색이 존재한다. 형태와 색이 함께해야 하나의 존재로서 이름을 가지게 된다. 세상의 만물이 창조 되었어도 빛이 없으면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그 하나하나를 모두를 사랑하시어 빛을 만들어 사랑하는 그들의 존재를 증명해 주셨는지도 모른다.

 

 

 인류 문화의 발전은 결국 시각이 만들어낸 미의 형상이 인간의 정신세계에 구체화되고 보편화 되된다. 미를 추구하게 되는 인간 활동의 기록이 예술사이며 문화사를 구성하고 있다. 인간의 미감은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변한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보다  앞서가면 전위예술이라 부르고 지나간 것을 고전이라 칭한다.

 

 

 절대미는 존재하는가? 어떤 사람은 존재 한다 믿고 전생을 바쳐 찾아 나선다. 어떤 이는 허상이라 말 한다. 존재 유무를 논하는 일은 오래전부터 논쟁해왔다. 이는 좀 철학적 접근이 필요한 주제라 생각된다. 

 

 인류가 문화라는 일정 형식을 가진 정신문화가 그리스에서 처음 폭발 했을 때 벌써 그 주제 토론에 들어갔다고 생각된다. 서구 문화의 조각 건축 회화에 관한 미의 보편적 기준들이 당시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플라톤은 우리가 진상(眞狀)이라 믿는 형상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라고 말했다. 인간의 감각이 만들어내는 가상(假狀)에서 벗어나 본질을 찾아야한다고 주장했다.

 

 

 동양에서는 종교적 사유를 통해 그 깊이를 더했다. 불교의 정신세계는 우리의 현세를 미(美)와 추(醜)가 분별되는 이원(二元)의 세계이며 이는 실상이 아닌 헛된 미망의 세상이라고 바라보았다.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미추(美醜)의 분별심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아름다움의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말한다.  불법은 수행을 통한 깨달음으로 미추가 구분되지 않은 일원(一元)의 세상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진정으로 생멸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정토(淨土)며 부처의 세계라고 말한다.

 

 

 미는 인간의 정신 활동이 만들어내는 형상이다. 미와 추의 구분이나 존재에 대해 논하는 일은 현실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게 어쩌면 부질없는 일이다. 그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 논해야 모두의 삶의 질을 높이고 정신문화를 고양하며 생활과 밀착된 논의가 된다.

 

 

 인간이 추를 멀리하고 미를 가까이하려 함은 미가 감동을 유발하여 그 감동이 정신적 육체적 기쁨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예술이 만들어내는 미의 가치는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양의 기쁨과 감동을 주었는가? 가 진정한 그 가치(value)다. 

 

 고급예술과 하급예술(대중예술)을 구분지어 말하는 것도 바른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따라서 가치의 측정은 생활 속의 감동의 총량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기쁨과 감동의 총량과 관계없이 돈으로 표시되는 물질적 가치(price)는 예술의 본질과는 관계없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가치며 또 하나의 사기행위라 말할 수 있다.

 

                                                            (2015.1.22 시각장애인과  못다한 대화를 아쉬워하며)

 

 

 

                                                    (홍매 2008,유화 46x38 )

梅一生寒不賣香

 

 

 

 

 

 

 

 

' > 오늘의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4류 집단(울컥)  (0) 2015.09.04
or let me die!(보물찾기)  (0) 2015.07.10
향기(香)  (0) 2015.01.19
손이 시려운 날에  (0) 2015.01.14
쌀 이야기  (0) 2015.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