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폭 병풍의 실경 산수화를 바라보다(북한산 둘레길:옛성길)
구기동 버스 정류장에 내리니 벌써 등산복 차림의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구기동은 평창동과 이웃하고 있지만 평창동만큼 그리 화려하거나 이색적이지 않고 관악산이나 아차산 밑에 있는 동네와 별반 다름이 없다. 서울 사람들에게도 구기동이란 좀 낯선 동네 이름이다. 이 동네 주민들이나 북한산을 등반 하는 사람 외에는 이 산골자기 동네에 굳이 올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이곳의 좋은 환경 때문에 미술관이나 문화예술 시설들이 많이 들어서고 있다.
'옛성길' 가는 길은 구기터널 방향으로 걸어가다 터널 앞에서 우측 주택가 골목으로 들어가 산길로 올라간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 10분 쯤 걸어가니 옛 성문이 나온다. 탕춘대성 암문으로 한양의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성곽이라고 안내판에 설명되어있다. 성문과 연결된 성벽이 좌우로 100미터쯤 나지막하게 뻗어 나가고 있다. 성문 치고는 좀 작다. 문 위에 누각도 없다. 안내판에는 암문이라 설명되어있으나 외부에 너무 노출돼있다는 생각이다. 암문은 통상 곡각지점에 눈에 띠지 않도록 나지막하게 만든다. 성벽의 높이로 보아 성곽공사를 다 끝마치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는 유적으로 보인다.
옛 성곽의 정취는 가을 색이 짙어질 수 록 바라보는 이의 감상의 깊이를 더하게 만든다. 검게 변색된 커다란 받침돌, 돌을 덮은 검푸른 이끼, 성벽 돌 틈 사이를 비집고 뿌리를 내린 잡초들, 수직의 벽을 기어오른 붉게 물든 담쟁이 잎을 바라보노라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외부의 적이 두려워 성을 쌓았던 자들이나 높은 성벽을 넘어 들어와 정복의 쾌락을 누렸던 자들이나 모두 세월의 공격 앞엔 힘없는 패자가되어 떠나가 버렸다. 무심한 담쟁이만이 세월에 굴하지 않고 까칠한 촉수를 차가운 돌 위에 끊임없이 붙여나가고 있다.
옛 시인 묵객들은 옛 궁이나 성터의 부러진 돌기둥이나 깨어진 작은 기와 조각 속에서 시간이 전해주는 교훈을 찾아내고 내면의 자기 성찰을 통하여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불광동방향으로 가는 능선 길은 둘레길이 생기기전에 등산객들의 많았었는지 등산로에는 발길에 닳아서 맨들맨들한 돌들이 많이 눈에 띄고 길 옆 으로는 큰 소나무들이 제법 많이 자라고 있다. 능선 길을 따라 산 마루에 이르니 전망대가 설치되 있다. 서울시에서 선정한 '우수조망명소'다. 서쪽에서 발기한 우람한 산세는 족두리봉에서 향로봉 비봉 사모바위 승가봉 문수봉으로 이어져 동으로 뻗어 나가며 가을 하늘을 양분하고 있다. 북한산은 바라볼 때마다 감탄사를 발하게 만드는 명산이다. 웅장한 자태는 바라보는 장소에 따라 그 감상이 다르다. 산 동편의 우이동이나 수유리에서 바라보면 도봉산 오봉을 배경으로 한 백운대와 인수봉의 힘찬 기상이 일품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내린 산자락은 이 땅의 모든 지기를 한데모아 터질듯 발기한 거대한 원추형 암 봉이 압권이다. 서편의 불광동 방향에서 바라보면 족두리봉에서 시작하여 문수봉으로 이어지는 암 봉의 파노마라다. 멀리 떨어져 바라볼 수 록 8폭 병풍에 그려 넣은 실경 동양화를 보는 느낌이 든다. 내가 찾아낸 최고의 서편 명소는 봉산 능선의 끝자락 수색 뒷산에서 바라보는 북한산의 모습이었다.
전망대에서 솔밭 길을 20분정도 내려오니 구기터널과 연결된 큰길이 나온다. 산 아래엔 공원과 쉼터가 있다. 옛성길 코스는 여기서 끝난다. 둘레길 코스 중에서 가장 짧다. 안내 지도에는 1시간 30분 코스로 나와 있으나 나는 오늘 2시간 반이나 걸렸다. 아직 해가 남아있지만 오늘 일정을 여기서 끝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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