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소리 들으며 걸어가는 사색의 공간.(북한산 둘레길:명상 길)
성신여대 입구에서 단단하게 점심 식사를 하는데 창밖으로 우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침부터 꾸물꾸물하던 하더니 기어이 빗방울이 떨어진다. 버스에 올라 정능으로 가는길 중간 정거장에 어린 유치원생들이 우루루 올라오더니 병아리 떼같이 재잘거린다. 유치원 어린이들은 언제 보아도 귀엽고 사랑스럽다. 함께 탄 보호자들의 대화내용을 들으니 오늘 우리가 걷기를 시작하는 생태공원에 현장 학습을 가는 중이다.
생태공원에 도착하니 빗방울은 멈추었으나 하늘은 언제라도 비를 쏟아 부을 태세다. 오늘 걷는 구간은 '사색의길'이다. 공원의 정자에 앉아 쉬고 있는 할머니들에게 북한산둘레길 올라가는 길을 물었다. 산위 언덕길을 가리키며 따라 올라가면 둘레길이 나온다고 말한다. 앞에 젊은 남녀가 걸어가고 있다. 아내와 나는 천천히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소나무 숲이 욱어진 계곡에 능선 아래를 따라 평탄하게 길이 이어지고 있다. 발밑의 부드러운 흙 촉감이 맨발로 걸으면 더 좋을 느낌이다. 북한산에서 이처럼 부드러운 흙길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길가 풀숲에서 까투리 한 마리가 갑자기 나타나 바위 뒤로 사라졌다. 사라진 놈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데 풀 넝쿨 속에서 4마리가 한꺼번에 기어 나와 종종 걸음으로 건너편 풀숲으로 기어간다. 크기로 보아 늦봄에 부화하여 아직 독립하지 못한 한배의 형제들로 보인다. 아내가 카메라를 들고 사진에 담으려 초점을 맞추는데 그 놈들은 벌써 숲속으로 자취 감추어버린다. 이놈들 5마리가 무사히 커서 이 정능 골짜기에서 그 기괴한 울음소리를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선물하기를 바래본다.
산길도 너무 좋고 생각지도 않은 꿩 떼들을 만나 즐거운 마음으로 걸어 나갔다. 한참을 걸어왔는데 느낌이 좀 이상하다. 둘레길의 주요지점 마다 붙어있는 표지판이 보이지 않고 이쯤에서 둘레길이 나와야하는데 길을 잘못 들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뒤에 걸어오는 부부가 있어 정능 방향으로 가는 둘레길을 물었다. 우리가 길을 잘못 들었다 출발점에서 아랫길로 들어섰어야하는데 윗길로 걸어온 것이다. 정자에서 쉬고 있던 노인들이 알려준 길은 언덕위로 올라가면 '솔샘길'로 가는 길과 만나게 된다는 의미였다.
왔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큰 걱정이나 불만은 없다. 쉬엄쉬엄 걸어가는 길이고 빨리 목적지에 가야할 필요성도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정능 골짜기에 내가 좋아하는 소나무 숲속 길을 걸었고 좀처럼 보기 힘든 꿩 떼들도 구경한 셈이다.
'명상의길' 코스는 산길을 내려와 정능 2동의 버스 종점이 몰려있는 상가지역을 통과하였다. 산 밑에 있는 넓은 버스 종점에 도착하니 빗방울이 제법 굵어지고 있다. 우산을 바쳐 들고 산길을 올랐다. 비가 내리는데도 산길 걷기에 나선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띄는 걸로 보아 북한산 둘레길은 성공적인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산 능선을 하나 통과하자 숲은 제법 깊어져 간다. 이 구간은 과거 등산로가 없던 지역이다. 새로 난 폭 2미터정도의 길은 산 3부 능선을 따라 완만하게 이어져 나간다. 높은 산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싱거운 코스지만 내가 걷기엔 참 편안한 길이다.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없던 지역이어서 길 양편 빽빽이 들어선 활엽수림이 마치 인도네시아나 아마존의 정글 속을 지나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번잡한 등산로에서도 멀리 떨어져있고 산 아래 동네에서도 멀어 도시의 소음에서 해방된 공간이며 산중의 적막감을 체험할 수 있는 구간이다. 걸으면서 이곳이 국민대 뒷산을 통과하고 있다는 감이 들 뿐이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기준이 다르겠지만 지금까지 걸어온 둘레길 중에서 이 구간이 가장 멋있고 인상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가 이 구간을 '사색의길'이라고 이름 붙였는지, 걷기운동에 일가견이 있는 분이 거나 길을 꽤 많이 걸어본 경험 있는 분이 작명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굵은 빗방울이 하늘을 덮은 나뭇잎에 부딪치고 다시 우산으로 떨어진다. 우산을 바쳐 들었으나 빗방울은 어깨를 타고 몸을 적셔온다. 우산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사색의 숲길을 통과하였다. 걷기의 매력들 중 하나는 빗속을 혼자 걸어가는 경험이다. 바람은 없이 조용히 비가 내리는 날에 걸어보라. 빗방울이 우산에 떨어지는 소리만을 들어가며 먼 길을 걸어본 사람은 걸으면서 생각한 그 사유의 깊이가 평소보다 훨씬 깊고 내밀했음을 스스로 느낀다.
오늘의 걷기는 정능 골짜기를 통과하여 평창동 마을 입구에서 끝을 매졌다.
201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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